“내년 성탄엔 고향 우크라에 갈 수 있겠죠”
크리스마스인 25일 오후 4시, 고려인 마을이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의 한 교회에서 러시아어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한국인 목사가 두 손을 들고 “가뭄이 온 광주에는 물을, 전쟁에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에는 평화를”이라고 말하자, 옆에 선 사람이 러시아어로 이 말을 통역했다. 이날 이곳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른 20여 명은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내로 피란 온 고려인 동포와 그 가족들이다. 전쟁의 화마를 피해 찾아온 ‘낯선 고향’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다.
고려인은 지난 19세기 연해주에 정착했다가 소련 당국에 의해 시베리아 등으로 강제 이주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에 거주하는 동포와 그 후손들을 가리킨다.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 광주의 고려인 마을로 피란 온 고려인만 850여 명이다.
대부분 기독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성탄절은 연중 가장 큰 행사다. 원래는 온 친척이 한데 모여 잔치 음식을 나눠 먹는 게 전통이다. 대신 이들은 이날 교회에서 떡을 나눠 먹고 한국어와 러시아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아이들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고달픔을 잊었다.
황블라디미르(38)씨와 아내 레나(35)씨의 경우, 이달 초 세 아이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중소 도시 미콜라이우에서 전쟁을 피해 한국에 왔다. 황씨는 부모가 모두 고려인이고 아내는 순수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이 가족은 한국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이날 우크라이나 전통 빵 ‘칼레’와 통조림 햄, 그리고 김치를 함께 먹었다고 했다. 간단한 한국말만 할 줄 아는 황씨는 더듬거리며 “교회에서 우크라이나가 하루빨리 평화를 되찾길 기도했다”고 했다.
이 가족의 고향 2층 집은 지난달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반쯤 무너졌다. 아이들을 구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에 황씨는 고려인 마을 측 도움으로 한국에 왔다. 세 아이 키리우(3), 아르첨(7), 크리스티나(15)도 성탄절인 이날 “내년에는 한국인 친구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목수로 일했다는 황씨는 성탄절 다음 날인 26일 새벽 경기도 안산으로 일을 구하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앞으로 생계를 꾸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이들의 이웃인 박에릭(68)씨도 지난 6월 같은 미콜라이우에서 전쟁을 피해 한국에 왔다. 하지만 고향에 서른 살 막내아들을 두고 왔다. 그는 “대학을 나와 은행에서 일하던 아들이 이제 총을 들고 고향 땅을 지키고 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매일 밤 아들과 영상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는다고 했다.
전쟁 와중에 급히 한국으로 오느라 피란 온 사람들의 법적 신분은 제각각이다. 일부는 고려인임을 입증하는 문서 등으로 재외동포 비자를 받아, 체류 연장 신청을 하면 계속 국내에 머물 수 있다. 단순 노무 업무만 가능한 단기 방문 비자만 발급받은 경우도 많다. 피란 온 고려인 중 우크라이나인과 가정을 꾸린 사람들은 전쟁이 빨리 끝나 “내년 성탄절은 우크라이나에서 맞고 싶다”고 소망하기도 한다. 고령자나 원래 국내에 가족이 있던 사람은 이대로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많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현재 입국을 기다리는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만 2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입국 뒤에도 생계를 어떻게 이어갈지가 피란 온 이들의 고민이다. 지난 15일 한국에 온 박예브게니(49), 한나탈리아(48) 부부도 마음을 추스를 새 없이 요즘 일자리를 구하러 다닌다. 첫 2개월분 월세는 고려인 마을에서 지원해주지만 그 이후부턴 직접 생계비를 벌어야 해서다. 부부의 아들 한드미트리(8)군은 이날 크리스마스 예배에서 “아빠가 빨리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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