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노조 먼저? 개혁의 번지수가 틀렸다
정국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화물연대 파업을 계기로 용산 대통령실을 비롯해 정부·여당이 ‘노동’에 대해 총공세를 펴고 있다. 노동개혁이라는 명분하에 진행되는 정부·여당의 의도가 관철되면 진짜 나라가 좋아질 수 있을까. 필자는 이에 대한 반론보다 우리 사회가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한마디 보태려고 한다.
진짜 나라가 좋아지려면 경제가 활력이 넘쳐야 한다. 그렇지만 경제 활성화에 대해 정부·여당은 전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고작 ‘수출 드라이브’와 ‘스타트업 육성’ 정도다. 왜일까. 전 세계적인 불황 탓일까. 수십년째 고착화된 재벌 주도의 경제구조가 그럭저럭 유지되면 된다는 환상 때문일까.
짬날 때마다 자전거도 타고, 트레킹도 같이하는 친구가 있다. 오랜 세월만큼이나 속 이야기도 격의 없이 나눈다.
친구는 호남 출신이다. 1980년대에 지방대를 졸업했다. 당시 그룹사 계열 전자회사에 입사했지만 ‘출신 성분’을 이유로 2중 차별을 당했다. 결국 회사를 나와 1인 기업을 차렸다. 밥 먹듯이 밤샘을 하면서 지금은 직원이 30명 가까이 되는 기업을 꾸리고 있다.
친구는 전자회로 전문가다. 회사 인력의 20%가량이 개발업무 담당자일 정도로 기술력 확보에 공을 들이고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신제품 제조를 위한 전자회로 설계비가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였다. 그러나 하청을 발주하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점차 기술개발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건 납품 기회를 주는 조건으로 기술개발비를 중소기업에 떠넘긴 것이다.
심지어 한 대기업은 친구 회사가 회로 설계도를 완성하자 다른 중소기업에 넘겨 별도의 견적서를 받은 뒤 “회사 방침상 입찰이 의무화됐는데 다른 곳에서는 납품가를 더 낮게 써냈으니 입찰가를 더 낮춰달라”는 ‘농간’을 부리기도 했다. 친구는 “제품 생산을 해야 회사가 굴러가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수년 전 한 중견기업이 ‘TV홈쇼핑을 통해 판매할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열심히 기술을 개발했지만 막판에 포기했다. 필자는 답답해서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따졌다. 친구는 완제품 소비자가가 25만원가량인데 홈쇼핑은 ‘판매를 책임진다’는 이유로, 중견기업은 ‘자신의 브랜드를 이용해 수익을 거둔다’는 이유로 각각 3분의 1씩을 가져가는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이름이 꽤 알려진 이 중견기업은 친구 회사에 “무상 AS 비용도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이 조건대로 물건을 생산하면 1개당 1만원의 이윤도 남지 않는 구조였다. 결국 친구는 50대 중반에 대학원까지 진학해 ‘안전 분야’를 전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별도의 자체 브랜드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하청 구조만으로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다.
이런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한국의 중소기업은 이중삼중의 ‘착취구조’에 방치되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인 대기업들은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을 통해 챙긴 이윤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의 곳간을 채우고 있다. 수십년 넘게 반복된 이윤 착취 구조이지만 역대 어느 정부도 이 구조를 깨지 못하고 있다. 입법권을 가진 여의도의 선량들도 손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 통해서만 이윤을 챙기는 것은 아니지만 중소기업의 눈높이에서 보면 분명 심각한 문제다.
중소기업들이 이렇게 허덕이는 사이에 대기업들은 어땠을까. 첫번째는 ‘돈 쌓아 두기’다. 국내 100대 기업의 사내유보금(자본잉여금+이익잉여금)은 2012년 630조원에서 10년 만인 2021년에는 1025조원으로 395조원이 증가했다. 이 중 상위 10대 기업은 같은 기간 260조원에서 448조원으로 사내유보금이 늘었다. 두번째는 ‘세금 적게 내기’다. 한국수출입은행 자료를 보면 지난해 국내 기업·개인의 조세회피처에 대한 직접 투자액은 112억1000만달러에 달했다. 이 중 대기업의 투자액은 58억1100만달러로 절반 이상(51.8%)을 차지했다. 조세회피처에 돈을 부어 넣는 규모는 2012년 18억1200만달러에서 2016년 47억3800달러 등으로 최근 10년간 증가세다.
한국 경제는 이처럼 ‘돈맥경화’로 병들고 있다. 보수 정권답게 경제 활성화를 꾀하려면 진정으로 중소기업이 강한 경제구조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경제개혁안을 내놓아야 한다. 재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도 도모해야 한다. ‘노조 탓’ 타령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chooh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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