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구간 단속, 고속도로에만 필요할까

기자 2022. 12. 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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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에서 함부로 내뱉을 말은 아니지만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의문을 갖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어? 이거 예전에 해봤던 건데’하는 일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9년 3월11일 오전 9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건물 앞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들의 긴급 공동 기자회견에 나는 보건 분야 전문가로 참석해 한마디를 보탠 적이 있다. 당시 발언의 요지는,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바짝 장시간 노동을 한 다음 충분히 쉬기만 하면 괜찮은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법정근로시간은 엄연히 주 40시간이니, 연장근로 한도까지 포함된 주 52시간을 마치 표준인 것처럼 쓰지 말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날은 경사노위 본회의가 예정되었던 날이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주 52시간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현행 3개월로 정해진 탄력근로제의 산정 기간을 1년으로 연장하고, 연장·휴일근로 시간을 적립해서 나중에 길게 휴가를 쓰도록 하는 근로시간저축계좌 도입이 핵심 의제에 속해 있었다. 휴대전화 메모앱 덕분에 이렇게 지난 기록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작금 21세기에,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되었다.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의 ‘자유’를 제공하겠다는 고마운 이들 덕분에 말이다.

지난 12일 노동시장 개혁 전문가들의 논의기구라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공정한 노동시장, 자유롭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라는 권고문을 발표했다. 권고문은 한국 사회 노동시장 문제의 핵심이라는 임금구조와 근로시간에 대한 개혁과제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 중 근로시간 개혁의 골자는 노사의 자율적 선택권을 확대하고 근로시간과 휴가 형태를 다양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장근로 시간의 관리 단위를 현행 1주에서 월·분기·반기·연 단위 중 ‘노사 재량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연장·야간·휴일 근로에 대한 보상을 수당이 아닌 시간으로 적립하여 나중에 ‘자유롭게’ 휴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친절하게 ‘제주 한달살이’를 휴가 활용의 예시로 적어놓기도 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겨우 10%를 넘나들고, 10인 미만 사업장에는 취업규칙을 작성할 의무가 없으며, 5인 미만 사업장에는 근로기준법상의 연차와 유급휴가 규정조차 적용되지 않는데 이토록 큰 자유와 선택권을 하사해 주시니 과분한 대우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일주일 뒤에는 부총리, 고용노동부 장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모여 국회의 입법을 촉구하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신문기사 제목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추경호 ‘주 52시간, 삶의 질 저하’ 연장근로법 통과 호소”가 그것이다. 언뜻 보면 주 52시간 장시간 노동이 삶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노동시간을 규제해야 한다는 이야기 같지만,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주 52시간밖에 일을 못하면 삶의 질이 저하되니, 추가연장근로 허용기한을 올해 이후까지 연장하자는 것이다. 노동부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녁이 있기에 앞서, 저녁을 드실 여건부터 갖춰드려야 합니다”라고 썼다. 노동자가 법정근로시간인 40시간을 넘어 초과노동 허용한계인 52시간을 일했는데도 여전히 저녁밥 먹을 여건이 안 된다면 담당 장관으로서 되게 미안할 것 같은데, 오히려 과로의 자유를 선물로 주시겠단다.

이번주에 60시간 일했지만 다음주에 20시간 일하면 결국 평균은 40시간이니까 괜찮다? 사실 보건학적으로 합리화될 수 없는 발상이다. 도로의 과속 구간단속을 두고, 측정 구간을 길게 해서 바짝 속도를 내고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충분히 쉬는 게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말이다. 주 30시간 노동, 주 4일 근무를 향해 세계가 움직이고 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주 52시간도 모자라 노동자가 자유롭게 노동시간을 늘릴 방도를 찾고 있으니, K노동의 기개라고 해야 할까?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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