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식의 온차이나] ‘위안화 원유 결제’ 허망한 해프닝
사우디아라비아 “때가 아니다” 거절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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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팬데믹 와중에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2월 초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중국·아랍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전 세계를 깜짝 놀랄만한 ‘빅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중동산 원유·천연가스 수입을 대폭 늘릴 계획을 밝히면서 “위안화 원유 결제를 추진하겠다”고 했죠. 미국 달러 패권의 중요한 한 축인 ‘페트로 달러’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겁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언론이 이 발언을 대서특필했죠.
그런데, 정작 회의가 끝난 이후 중국 관영 언론은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애써 피하는 분위기입니다. 시 주석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을 정리한 신화통신 보도는 이례적으로 간결했고, 위안화 결제 문제는 아예 언급도 안 했어요.
◇무산된 ‘페트로 위안’
다음날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중국·아랍정상회의 공동성명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공동성명은 18개 합의사항을 담았는데, 위안화 원유 결제에 관한 내용은 없었어요. 호기롭게 위안화 원유 결제를 제안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겁니다.
중국 내에서는 실망과 탄식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와요. 포털사이트 텅쉰왕의 한 블로거는 “세계 주류 매체는 물론, 중동 지역 뉴스도 살펴봤는데 위안화 원유 결제를 합의했다는 소식은 없었다”면서 “위안화 원유 결제는 가짜뉴스”라고 썼습니다. ‘위안화 원유 결제가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는 탄식조의 글도 적잖았어요.
시 주석은 이번 사우디 방문에 상당히 공을 들였습니다. 미국과 사우디 간의 관계가 순탄치 않은 틈을 타서 중동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죠. 중국은 이번 방문 기간에 사우디와 총 50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투자협정을 맺었습니다.
심지어 전통적인 우방인 이란마저 희생타로 삼았어요. 공동성명은 이란 핵개발 반대를 구체적으로 명시했고, 이란·아랍에미리트 간 3개의 섬을 둘러싼 영토 분쟁의 평화적 해결도 강조했는데 모두 이란이 민감하게 여기는 내용이었습니다. 뿔이 난 이란이 주이란 중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어요.
◇위안화 국제화의 관건
중국이 이렇게까지 위안화 원유 결제에 매달리는 건 ‘페트로 위안’이 국제 결제통화로서 위안화가 한 단계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이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중국의최대원유수입국이에요. 사우디 석유 수출의 27%,화학제품 수출의 25%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원유는 위안화로 결제하고 있어요.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를 틈타 위안화의 활용 범위를 넓힌 겁니다.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2위 수입국이죠. 여기에 1위 수입국인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가세한다면 위안화는 날개를 달게 되겠죠.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이지만 위안화의 국제결제 통화비중은2.37%로세계 5위권(올 11월 현재)입니다. 연초 엔화를 제치고 4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5위로 내려앉았죠.
◇사우디가 거절한 이유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사실 당연해 보입니다. 빈살만 왕세자가 실권을 장악한 이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지만, 중동의 지정학적 상황을 보면 사우디가 미국에 등을 돌리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슬람 수니파 왕정 국가인 사우디는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앙숙 관계죠.
석유 위안화 결제가 갖는 국제정치적 의미를 사우디가 모를 리는 없을 겁니다. 중국과 경제 협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 중동 지역의 안보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겠죠. 미국은 사우디를 비롯해 이번 정상회의에 참석한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바레인·카타르·오만)의 든든한 안보후원자입니다.
위안화 자체가 국제 결제 통화로서 취약하다는 요인도 있어요. 무역 통화로서 각국의 수용 정도나 환금성 등이 미국 달러나 유로, 파운드 등에 비해 떨어지고 국가가 환율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등 환율 결정 시스템도 불투명합니다.
최근에는 달러화 강세 속에 달러화에 대한 위안화 가치가 10% 이상 떨어진 일도 있었죠.
◇중 전문가 “긴 시간 걸릴 것”
이렇게 신뢰도가 떨어지는 위안화에 굳이 목숨을 걸 이유가 없는 겁니다. 게다가 GCC 국가들은 원유를 팔아 번 돈을 대부분 미국 국채로 보유하고 있어요.
사우디 정부 소식통도 로이터 통신에 ”아직은(위안화로 석유를 결제할) 때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내 전문가들도 비슷한 시각이에요. ‘시진핑 책사’로 불리는 진찬룽 인민대 국제관계학원부원장은 위챗에 올린 동영상에서 ”다른 상품 수출입은 위안화 사용 비중이 점진적으로 늘겠지만, 원유결제는 너무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 주석이 오래간만에 등장한 국제무대에서 세계 여론의 주목을 끌어보려다 망신만 톡톡히 당한 꼴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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