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자라지 못한 ‘난장이’들에게 희망 쏘아올리고 떠나다

김종목 기자 2022. 12. 25. 22:4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작가 별세
1965년 경향 신춘문예 등단
유신체제 말미 난쏘공 출간
빈민·노동 등 사회 문제 직격
“이 책 필요없는 시대 왔으면”
작가의 꿈은 아직도 진행형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가 2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문학평론가)가 전했다. 향년 80세.

이 교수는 이날 저녁 기자와 통화하며 “조세희 선생님이 25일 오후 7시쯤 강동경희대병원에서 숙환으로 작고하셨다. 빈소는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유족에게서 별세 소식을 확인했다.

고인은 1942년 8월20일 경기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에서 태어났다. 보성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녔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경희대 재학 중 ‘돛대 없는 장선’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후 소설을 쓰지 않고 오랜 공백기를 가졌던 그는 1978년 산업화로 고통받던 도시 빈민의 삶을 그린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출간했다. 서울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 사는 ‘난장이’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 빈민의 삶을 그린 연작소설집이었다. <난쏘공>은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면서도 환상적 기법을 동원해 미학적 가능성을 높인 한국문학사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난쏘공> 100쇄를 찍은 1996년 6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계엄령과 긴급조치의 시대였던 1970년대에 <난쏘공>을 쓴 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우리 삶에 ‘경고팻말’이라도 세워야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한 작품이 100쇄를 돌파했다는 것은 작가에겐 큰 기쁨이지만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인이 바라던 시대는 오지 않았다. 책은 2017년 300쇄를 돌파했다. 당시 누적 발행부수는 137만부였다.

고인은 줄곧 한국 노동과 계급 문제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2020년 겨울 조 작가와 만났다고 한다. “선생님이 그때 계속 걱정하시던 게 (김용균씨의 죽음 등) 노동자들과 이들이 처한 비극적 상황이었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노동 문제에 관심을 잃어가는 거 같다. 작가나 평론가들이 깊이 발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조 작가는 2011년 강연에서 “20대들은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라. 냉소주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공동의 일, 공동의 숙제를 해낼 수가 없다.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난쏘공>을 두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 노동문학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970년대 이래로 <난쏘공>을 우화적 알레고리로 읽는 경향 때문에 사람들이 소설의 계급성을 잘 모르거나 오해했다. 선생님이 통렬하게 고민한 게 노동자와 도시 빈민, 우리 사회 최하층 약자들에 대한 정의 문제다. 문학사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별세 소식이 알려진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추모의 글이 이어졌다. 플랫폼C 활동가 홍명교씨는 고인이 2009년 1월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내가 쓰면 이건 학살이다’라고 쓸 거야”라고 말한 기사를 링크하며 명복을 빌었다.발인은 28일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