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배우의 버킷리스트… 66년 관록 묻어난 ‘좌절의 시대’

이강은 2022. 12. 25.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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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 첫 연출작 연극 ‘갈매기’
전 세계 사랑받는 러 안톤 체호프 희곡
작가·배우 지망 인물 비극적 사랑 그려
“사실주의극 교본… 원작대로 연출 노력”
배우 대사와 무대 장치도 꾸밈없이 표현
주·조연 출중한 연기력 관객 몰입 고조
배우 오만석 “곱씹을수록 향 나는 작품”
현역 최고령 원로 배우 이순재(87)의 생애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은 연극 ‘갈매기’가 막이 올랐다.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 희곡 ‘갈매기’를 직접 무대에 올리는 건 이순재에게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체호프가 문학활동 후기에 창작한 ‘갈매기’는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전 세계 연극 무대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관객과 만났다. ‘이순재표 갈매기’는 어떨까. 역시 연기 인생 66년째인 대배우이자 구순을 목전에 둔 어른다웠다. 작품과 삶에 대한 통찰, 관조가 오롯이 담겼다. 연출 초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대지주 ‘쏘린’ 역으로도 출연한 이순재가 극 중 ‘니나’ 역을 맡은 진지희와 연기하는 모습. 아크컴퍼니 제공
이순재는 앞서 개막 전날인 20일 기자간담회에서 “체호프의 작품은 정치, 경제, 문화, 의학, 지리 등을 다 꿰뚫는 작가의 해박한 지식 속에 나온 산물이어서 원작 그대로를 담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갈매기’는 사실주의 연극의 교본이다. 배우의 연기도 꾸밈없이 사실적으로 표현해야 작가의 의도와 사상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 무대장치 등이 원작에 충실하게 구현됐다. 여기에만 머무르면 이 연극은 관객에게 다소 어렵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체호프가 당시 구습과 기득권에 젖어, 인간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는 예술 장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연극계에 빗대 정치·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의식을 녹인 게 ‘갈매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재 연출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2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 내내 극적인 생동감을 유지하고 관객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주연뿐 아니라 조연배우들 역시 과장되지 않은 연기로 극적 긴장감을 조였다가 풀면서 간간이 관객 웃음도 유발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고, 특히 이 작품은 배우가 살아야 하는 작품이다. 배우들이 이 작품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연기력에 집중해서 만들었다”고 한 이순재의 말이 와닿는다. 배우로도 무대에 서는 이순재와 함께 대지주 ‘쏘린’ 역할을 맡은 주호성(72)은 “이순재 선배님은 배우들에게 ‘그렇게 연기해선 안 되는 부분’만 바로잡아주고 인물의 구체적 성격 창조는 배우의 예술로 남겨뒀다”고 말했다.
이순재가 생애 첫 연출작으로 연극 무대에 올린 안톤 체호프 대표 희곡 ‘갈매기’의 한 장면. 사실주의 연극의 교과서로 불리는 원작을 충실히 구현한 작품이다. 아크컴퍼니 제공
연극은 작가 지망생 ‘뜨레블례프’(극 중에선 ‘꼬스차’로 불림)와 유명 배우를 꿈꾸는 ‘니나’의 좌절과 비극적 사랑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의 애증과 질투, 욕망이 뒤섞이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특히, 뜨레블례프가 어머니이자 유명 배우인 ‘아르까지나’와 그녀의 연하 연인이자 유명 작가인 ‘뜨리고린’이 상징하는 기성체제의 벽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연인 니나마저 뜨리고린에게 빼앗기며 결국 삶을 포기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작품 제목이기도 한, 아름다운 호수 위를 날다 뜨레블례프의 총에 맞아 죽은 갈매기는 아이로니컬하게 뜨레블례프의 처지와 닮았다. 자유롭게 날다 총에 맞고 죽어 박제된 갈매기가 조명을 받으며 연극이 끝나는 장면은 여운이 짙다. 이순재는 “작품 속 갈매기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체제 밑에서 젊은이들의 원대하고 아름다운 꿈이 좌절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무대에는 주호성을 비롯해 소유진, 이항나, 김수로, 오만석, 이경실, 강성진, 정동화, 진지희 등 연극·뮤지컬 무대나 TV, 영화에서 낯익은 유명 배우가 많다. 모두 ‘이순재 선배의 명예에 누가 되지 말자’고 다짐하며 연습했다고 한다. 서로 호흡과 어울림이 좋아 보이는 이유다. 18년 전 연극 ‘갈매기’에 출연했던 오만석은 “그때는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뜨레블례프였고, 지금은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뜨리고린을 맡게 됐다”며 “좋은 작품은 곱씹을수록 향이 난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고 참여한 소감을 전했다.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내년 2월5일까지.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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