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쿠르드인들 “파리 총격 사건은 우리 겨냥한 것”
프랑스 국적 60대 남성 범행에 여성운동 지도자 등 3명 사망
당국 “명백한 외국인 표적 범행…테러 단체 연계는 못 찾아”
쿠르드민주평의회 “정치적 공격…튀르키예 연루된 테러”
아흐메트-카야 쿠르드문화센터와 쿠르드 식당이 마주 보고 있는 프랑스 파리10구 앙기앙 거리는 24일(현지시간) 아침부터 골목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파로 가득 찼다. 이곳은 전날 쿠르드인 3명이 숨지고 3명이 중태에 빠진 총격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프랑스쿠르드민주평의회(CDKF)의 본부로 사용되는 쿠르드문화센터 입구에는 총격 사건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센터 안에는 분향소가 마련됐다. 사람들은 사진 앞에 꽃을 놓거나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며 추모한 뒤에도 발을 떼지 못했다.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라흐라(19)는 “비통하다”며 “우리의 분노와 함께 쿠르드인은 평화를 원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골목에서 1.2㎞ 떨어진 파리 중심가 레퓌블리크 광장에도 많은 인파가 모였다. 전날 총격 직후 벌어진 시위를 경찰이 최루탄을 쏴서 강제 해산시키자 CDKF는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시위를 재개했다.
오후 1시쯤 광장에서 100m가량 떨어진 탕플대로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 무력충돌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난 시위대는 차량을 넘어뜨리고 경찰을 향해 벽돌을 던졌다. 쓰레기통 등 곳곳에 불이 붙었다. 경찰은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로랑 누네 파리 경찰청장은 시위 참가자 11명을 체포했으며 경찰관 31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쿠르드인들은 이번 사건을 튀르키예가 배후에 있는 ‘테러’가 아닌 인종차별주의 성향의 개인이 저지른 ‘단독 범죄’로 규정한 프랑스 당국의 판단에 분노하고 있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은 “용의자는 명백히 외국인을 표적으로 삼았다”면서도 “구체적으로 쿠르드인을 목표로 삼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극우세력이나 테러단체와의 연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사건 수사도 국립대테러검찰청(PNAT)이 아닌 파리 검찰이 진행한다.
파리 검찰청에 따르면 총격 사건 용의자는 철도 기관사로 일하다 은퇴한 프랑스 국적의 69세 남성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펜싱용 칼로 파리12구의 이민자 수용소에서 남성 2명에게 부상을 입혀 구금됐다가 최근 석방됐다. 그는 경찰에 연행될 때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러나 아지트 폴라 CDKF 대변인은 “이 사건이 테러로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 분노한다”면서 “우리에게 이 공격은 정치적인 공격이며, 튀르키예가 고의적으로 유지하는 긴장의 일부”라고 말했다.
튀르키예는 유럽연합(EU)과 미국이 테러단체로 지정한 쿠르드노동자당(PKK) 등 쿠르드족 단체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2019년부터 시리아 접경지대 쿠르드족 민병대를 소탕하겠다며 공습을 시작했고 지난 11월에는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상군 투입을 예고했다. 이브라힘 칼린 튀르키예 대통령실 대변인은 25일에도 트위터에 이번 시위로 전복된 차량 사진을 올린 뒤 “이들이 바로 시리아의 테러리스트 조직과 동일한 프랑스의 PKK”라고 비난했다.
총격 사건이 일어난 날 쿠르드문화센터에선 PKK 창립자인 사키네 칸시즈, 피단 도간, 레일라 소일레메즈 등 여성 활동가 3명의 10주기 행사를 논의하는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2013년 1월9일 파리서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당시 프랑스 사법당국은 튀르키예 스파이가 사건에 연루됐다고 판단했으나 튀르키예 국적 용의자가 재판에 회부되기 전 숨지면서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또 다른 CDKF 대변인 베리반 피라트는 BFM TV에 “2013년 사건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쿠르드인 공동체는 이번 사건으로 공포에 떨고 있다”면서 “프랑스가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총격 희생자 에미네 카라는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IS)와의 전투에 참여했던 쿠르드 여성운동 지도자이다. 시리아의 쿠르드인은 쿠르드 독립에 우호적인 국제여론 조성을 위해 IS를 상대하는 전투에 대거 가담했다. 그러나 IS 격퇴 후 ‘쿠르드 문제’는 방치됐다. 카라는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난민 자격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희생자인 미르 페르웨르는 가수 겸 작사·작곡가이자 튀르키예 출신 정치적 난민이다. 피라트 대변인은 그는 “쿠르드어로 글을 쓰고 노래해 에르도안 체제를 교란시켰다”며 체포와 투옥 위기를 피해 프랑스로 왔다고 전했다.
희생자 중 가장 연장자인 압둘라흐만 키질은 쿠르드 공동체에서 ‘어르신’으로 통했다. 쿠르드문화센터를 자주 방문하고 하루 종일 머무르며 공동체 내 각종 일에 열성적으로 임했다고 CDKF는 전했다.
파리 | 박은하 특파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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