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의 필사적 요구에…무시와 회피로 답하는 정부[키워드로 본 사건·사고 1년]
권리 보장 요구한 장애인들
1년 내내 출근 시위 벌였지만
시위 방식 문제만 지적하며
전장연 활동가들 대거 입건
올해 발생한 사건·사고를 관통하는 열쇳말 중 하나는 ‘불통’이다. 정부는 사회적 약자, 참사 피해자와의 소통에 인색했다. 때로는 이들을 고립시키려는 ‘전술적’ 언행도 보였다. 문제 해결을 늦추거나 도리어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든 정부의 이런 태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했다.
장애인들은 교육권·노동권·이동권 보장에 필요한 정부 예산 확충을 요구하며 1년 내내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정부에 예산을 늘려달라며 서한도 보냈지만 “관련 부처와 이야기하라”는 답변만 받았다. 대신 이들을 상대로 형사처벌과 민사소송이 이어졌다. 경찰은 집회·시위법 위반 혐의로 전장연 활동가들을 대거 입건했다. 서울교통공사는 법원에 지하철 운행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급기야 공사 측이 지난 14일 출근길 시위를 이유로 삼각지역 무정차 통과를 실행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책임 주체가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시위 방식만 지적하며 시민과 장애인을 갈라치는 것이 가장 무책임하다”며 “이 문제를 빨리 푸는 것은 소통으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인데, 회의장까지 쫓아다녀야만 겨우 만나주는 것 자체가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를 벗어나지 못한 주거취약계층과의 소통도 부족했다. 정부는 지난 8월 폭우 피해가 반지하 가구 등에 집중되자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러나 주거취약계층에 필요한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5조7000억원 삭감했다. 윤 대통령은 “공공임대주택이 늘어날 경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 부담으로 이어져 결국 경기 위축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취약계층을 상대로 임차료 등을 지원하는 주거급여는 내년에 서울 1급지 1인 가구 기준으로 최대 32만7000원에서 3000원 오르는 데 그쳤다. 그러면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완화와 법인세 인하로 다주택 보유자와 기업의 부담을 줄였다.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은 25일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주거 불안의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빚 져서 좋은 집에 가야 하는 게 아니라 적은 보증금으로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공공임대가 필요하고 주거급여를 확충해야 한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에겐
여권이 ‘정쟁’ 프레임 씌워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기도
정부의 불통은 국가 재난안전체계의 총체적 부실을 보여준 ‘이태원 핼러윈 참사’ 대응 때 극에 달했다. 분향소를 설치하면서 유가족들의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유가족들이 한데 모여 논의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하지 않았다. 국가책임 인정과 공식 사과, 책임자 처벌 등 유가족들이 제시한 6대 요구사항 이행도 지지부진하다.
여권은 유가족과 시민단체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정쟁’ 프레임을 씌웠다. 국민의힘에선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향한 ‘2차 가해’성 발언이 이어졌다. 유가족들이 49재를 맞아 설치한 시민분향소 인근에선 보수단체가 맞불 시위를 벌였고, ‘윤석열 잘한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15년째 국회에서 표류 중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두고도 진지한 토론은 찾아볼 수 없다. 국민의힘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이 법 제정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라도 대화와 토론이 필요한 법이지만, 국민의힘은 무시와 회피로 일관했다. 국회 앞에서 시민단체 활동가의 단식농성이 46일간 이어졌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 불참했고, 국회 법사위의 관련 논의는 보이콧했다. ‘사회적 합의’는 법 제정을 무한정 지연시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코드가 맞는 보수진영과만 선택적으로 소통했다. 새 교육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 표현이 강화되고 ‘성소수자·성평등’ 등의 용어는 삭제됐다. 역사 교사들이 “일방적 수정”이라며 반발했지만 정부는 무시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10월10일 연 정부조직개편안 간담회에는 ‘여가부 폐지’에 찬성하는 단체만 초청됐다. 반대 단체들을 제외해 불통 논란이 일자 그제서야 열흘 뒤 다시 자리를 마련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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