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투자자 보호 강화 서두르는데…한국은 논의조차 못해[끝 안 보이는 가상통화 빙하기]
금융당국에 사업 인가권 부여
유럽, 세계 첫 입법 표결 앞둬
미국은 포괄적 규제안 마련
영국·싱가포르도 제도 정비
가상통화 루나에 투자했던 30대 안모씨는 올해 5월 테라·루나 폭락 사태로 1억원에 가까운 손실을 봤다. 이후 안씨는 같은 처지의 테라·루나 투자자들을 모아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에 대한 고소·고발장을 검찰에 제출하고 가상통화 거래소 앞에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안씨를 비롯한 테라·루나 투자자들이 조금이라도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안씨는 “형사사건 수사와 별개로 아무리 노력하고 기다려도 피해 보상은 어렵다는 걸 저도 알고 있다”며 “가상통화 투자 손실금에 대한 책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루나는 스캠(사기) 코인이었다. 피해자가 또 발생하지 않으려면 스테이블코인 등 가상통화 유통을 규제하는 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올해는 가상통화 시장에 악재가 연달아 발생한 해였다. 가상통화 시장이 악재 넘어 악재를 만나면서 타격을 입은 것은 투자자들이었다. 테라·루나의 폭락 사태와 위믹스의 상장폐지로 인한 거액의 손실은 고스란히 투자자들에게 돌아갔고, 파산한 가상통화 거래소 FTX 이용자들은 거래소에 묶인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가상통화 시장의 사건·사고들과 투자자들의 피해는 결국 가상통화에 대한 규제 미비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세계 각국의 가상통화 입법 움직임에 속도가 붙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가상통화를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고, 싱가포르는 국민들이 위험한 투자에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신용카드로 가상통화를 구매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다.
테라·루나, FTX 사태 이후
최근 세계 각국의 가상통화 관련 입법 활동은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유럽연합(EU)은 내년 2월 ‘가상자산규제법(MiCA·Markets in Crypto Assets)’을 투표에 부칠 예정이다. MiCA에는 각국의 금융당국에 가상통화 사업에 대한 인가권과 제재권을 부여하고 투자자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MiCA가 유럽연합 표결을 거쳐 각 회원국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거래소를 비롯한 가상통화 사업자는 자기자본 등 일정 요건을 갖추고 규제당국의 인가를 얻어야 사업을 할 수 있다.
또한 MiCA는 규제 대상을 전자화폐토큰, 자산준거토큰, 유틸리티토큰으로 분류하고 차등 규제 하기로 했는데, 공통적으로 발행자에게 백서 공표를 의무화하고 내용과 형식도 규제하기로 했다. 발행자가 백서에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경우 투자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백서는 가상통화 발행 주체가 작성하는 사업계획서로 주식시장의 증권신고서나 투자설명서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지난 9월 가상통화를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가상통화 프레임워크’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프레임워크에는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등 기존 기관으로 하여금 가상통화 소비자 보호를 위해 불법적인 행위를 적극 조사하고 강력한 제재 조치를 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 정부는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해 순차적으로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도 가상통화 사업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 하원은 지난 10월 가상통화 관련 업무에 대한 규제를 포함하는 금융서비스시장법(FSMB·Financial Services and Markets Bill)을 의결했다. FSMB는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에 가상통화 감독 권한을 부여하도록 했다. 현재도 FCA는 가상통화 감독을 맡고 있었지만 감독 범위가 자금세탁방지(AML) 업무에 그치고 있다. 영국의 법안 심사과정은 3독회제가 기본인데 FSMB는 이달 상원에서도 2회 독회를 거쳤다.
싱가포르통화청(MAS)도 지난 10월 가상통화 투기를 억제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그동안 아시아의 가상통화 허브로 주목받았던 싱가포르는 올해 각종 악재의 중심에 섰다. 테라·루나 발행사 테라폼랩스를 비롯해 테라·루나 사태 여파로 파산한 스리애로캐피털(3AC)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은 FTX 투자로 손실을 봤다. 이에 MAS는 가상통화 사업자로 하여금 투자자에게 가상통화 관련 위험을 공시하도록 하고 신용카드로 가상통화를 구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자금세탁방지 초점 ‘특금법’
국내 유일한 규제 장치
관련 법 10여개 발의됐지만
여야 정쟁으로 통과 못해
“입법 서둘러 피해 막아야”
한국, 국회에 계류된 법안만 10개
한국의 경우 가상통화를 규제하는 법은 2021년에 시행된 가상통화 사업자 신고제 도입의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이 유일하다. 다만, 특금법은 자금세탁 행위를 방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가상통화 투자자 보호를 위한 법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가상통화의 성격을 규정하거나 구분하는 법도 없다.
이 때문에 가상통화 관련 투자자 보호나 불공정행위에 대한 규제는 각 가상통화 거래소의 자율에 맡겨져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테라·루나 사태 후 국내 5개 원화거래소(업비트·빗썸·코빗·코인원·고팍스)가 상장폐지에 대한 최소한의 공동대응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자율협의체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DAXA·닥사)를 구성해 운영 중이다.
현재 국회에는 가상통화와 관련된 법률안이 10여개 발의돼 있다. 그중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디지털자산법’에는 가상통화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과 더불어 투자자 보호를 위해 가상통화 거래소의 준비금 적립을 의무화하고, 금융위원회에 가상통화 사업자 감독 및 검사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여야의 정쟁으로 가상통화와 관련된 논의는 매번 뒷전으로 밀리면서 올해 내 통과가 어려운 상황이다.
입법의 미비로 피해를 보는 것은 투자자들인 만큼 정부와 국회가 가상통화 투자자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데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옥다혜 법무법인 미션 변호사는 “가상통화 시장에서 발생하는 불공정거래 행위는 기존 법체계로 규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금융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에 대한 제재 등이 담긴 입법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리즈 끝>
박채영·권정혁 기자 c0c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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