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사람들의 사회 [백승주의 언어의 서식지]
드라마를 본다. 이제 왕비는 자신의 시어머니이자 정적인 대비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왕비의 약점을 잡은 대비는 왕비에게 독설을 쏟아낸다. 왕비는 당황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왕비는 대비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고, 대비는 충격에 빠진다. 넋이 나간 시어머니를 내버려 두고 왕비는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뜬다. 왕비가 방문 앞에 다다르자 방문이 알아서 스르륵 열린다.
바로 이 지점, 나는 왕비의 수수께끼가 아니라 이상한 것이 알고 싶어진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왕비가 문 바로 앞으로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자동문 앞에서는 센서가 반응할 시간을 주려고 잠깐 멈칫이라도 해야 하는데, 왕비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을 통과한다. 저 방문은 자동문인가? 사실 나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조선시대 자동문 시스템의 센서는 바로 사람이다. 그냥 사람이 아닌, 얼굴 없는 사람들. 드라마를 보다 말고 나는 이런 사람들을 궁금해한다.
왕의, 왕비의, 왕녀 왕자의, 높은 벼슬아치들의 무대인 궁궐. 하지만 실제로 궁궐을 움직였을 궁녀와 내시들. 그러나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얼굴이 없는 존재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볼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존재들.
사회학자 고프먼은 이런 사람들을 '비인격'이라고 부른다. 고프먼은 그 대표적인 유형으로 근대 이전 시기의 하인과 노예들을 꼽았다. 유럽 귀족이 나오는 드라마에서 하인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숨어 있다가 귀족한테 뭔가 필요한 게 생기면 짠하고 등장하여 귀족을 돕고 다시 사라진다. 하지만 귀족이 자기 가족,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떠드는 그 무대에서 하인들은 동등한 사람이 아닌 일종의 소품에 불과하다. 귀족들에게 하인은 대화의 대상이 아닌 사물이다.
고프먼은 한 개인은 대화 즉 상호작용 의례를 통해 사회적으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상호작용 의례에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얼굴을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반려견 앞에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강아지에게는 사람의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인이나 노예도 존중할 얼굴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거 귀족들이 바로 옆에 하인이 있어도 마치 그들이 없는 것처럼 태연히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다시 드라마를 본다. 재벌의, 재벌 자식들의, 재벌 손자들의 이야기다. 배우의 뛰어난 재벌 연기 때문에 사람들은 몰랐던 재벌의 삶에 몰입하고, 드라마의 모델이 된 재벌의 실제 삶을 찬양한다. 아 저 시대에 반도체 산업의 가치를 꿰뚫어 보고 그 많은 역경 속에서도 뚝심 있게 반도체 산업을 키워내다니!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재벌들을 필요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재벌가의 가계도를 쭉 꿰고, 그들이 행적을 줄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가족의 얼굴보다 세계 최고 부자 일론 머스크의 얼굴을 더 많이 들여다본다. 우리는 머스크가 했다면 그의 이상한 헛소리나 기이한 행적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이해하려 든다. 재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는 그들과 일종의 대화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뭐 어떤가? 부자 친구들과 대화 좀 하겠다는데. 우리가 노예고 부자들이 주인님이라서 그들을 추앙하는 건 아니잖아?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얼굴 없는 이가 없고,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모두가 자기 얼굴을 가지고 동등하게 상호작용 의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그러니 돈 많은 부자에게 관심 좀 가지는 게 뭐가 대수인가? 하지만 우리는 드라마 속 모델이 된 재벌의 자본 축적 신화에 감탄하면서도, 그 신화를 위해 희생당한 이들의 이야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드라마 속 재벌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도 그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모르는 척한다.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여성들, 장애인들, 이주민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성소수자들의 이야기.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에게는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얼굴이 없다. 이 사회에서는 형식적으로는 모두에게 평등한 상호작용이 보장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장소, 환대'에서 김현경은 이를 신자유주의의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즉 신자유주의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존엄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자본에는 무한한 자유를 주고 노동에는 극도의 순응을 요구하는 것. 김현경은 이것이 신자유주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얼굴을 가지려면, 그리고 그 얼굴을 유지하려면 인간은 먼저 자신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의 구조는 존엄을 지킬 수 없게 만든다. 겨울에 난방 설비 없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잠을 청하는 이주노동자에게 존엄은 없다. 집 밖을 나와 가고 싶은 곳을 갈 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장애인에게 존엄은 없다. 시간에 쫓겨 차 안에서 먹고 마시고 쪽잠을 자며 화물차를 운전해야 하는 화물 운송 노동자에게 존엄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은 대화의 대상, 상호작용의 대상이 아니다.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와 같이 얼굴 없는 이들이 개최한 기자회견장에는 기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전혼잎·기자 없는 기자회견)
올해 정부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바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이들의 얼굴을 지우는 일이었다. 먼저, 이 정부는 가부장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여성가족부를 해체하는 것을 통해 여성의 얼굴을 지우고 있다. 전장연이 시위하는 지하철 역사를 무정차 통과하라는 방침을 내리고, 조선노동자와 화물노동자의 파업에 불법이란 딱지를 붙여 이들에게 얼굴 없는 존재로 돌아가라고 강요하고 있다.
20여 년 전 대학원생 시절, 서울 신촌의 한 허름한 밥집에서 엿들었던 네 남녀 용접공들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열띤 토론 중이었다. 생경한 전문 용어들 속에서 겨우 기억하는 것은 이런 말들이었다. 몇 밀리미터 강판을 용접할 때 주의해야 할 점, 용접할 때 불꽃 색깔의 의미. 그리고 또 기억하는 것? 자부심 가득한 그들의 얼굴들. 내가 하는 공부에 대한 자신이 없던 그때, 나는 그들의 얼굴이 부러웠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른 용접노동자의 얼굴을 본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유최안.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그 얼굴. 세상은 그와 그의 동료 노동자들의 얼굴을 지우려 했고, 그래서 그는 0.3평, 가로, 세로, 높이 1m 철장 감옥에 몸을 구겨 넣은 후 스스로 용접을 해 나가는 문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문이 사라지고 나서야 세상은 그에게 말을 걸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해야 했다.
바야흐로 자유의 시대다. 그 자유에 취해 재벌 서사에 열광하는 동안,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있다. 그렇게 얼굴 없는 사람들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공포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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