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에 기생하는 대표자들

한겨레 2022. 12. 2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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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노조 부패를 공직 부패, 기업 부패와 함께 척결해야 할 3대 부패로 규정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나치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가 내린 ‘정치적인 것’의 정의다. 그러면 적이란 누구일까? 슈미트는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슈미트는 이런 규정이 추상적이거나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실존적인 것이라 강조한다.

그렇다면 슈미트는 왜 이렇게 ‘적’의 존재를 강조한 것일까? 그 이유는 낯설고 이질적인 타인의 존재야말로 국가가 결속을 강화하는 데 그 무엇보다 유용하기 때문이다. 분열하는 국가에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외부에 도사리고 있는 ‘적’이다. 식민지 경험과 분단 모순에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 일본과 북한이 그런 존재다. 이 ‘외부의 적’은 내부의 우리를 서로가 얼마나 진심으로 아끼는지와 아무 관계 없이 ‘친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적대’라는 슈미트의 규정은 그리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란 생각도 든다. 문제는 정치적 적대가 국가 내부에서도 계속 발생한다는 데 있다. 슈미트가 스스로 밝히듯 이 내부의 대립에서 “약화하고 기생적이거나 희화화된 존재로까지 타락한 정치의 형태들이 나온다.” 실존의 문제로서 ‘적대’는 ‘결국엔 누가 살아남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적의 존재가 사적이 아니라 언제나 공적이며, 도덕적으로 악할 당위도, 미학적으로 추할 이유도, 경제적으로 해로울 필요도 없다고 말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실존적으로 누가 살아남느냐의 문제라면 현실에서 적은 대개 악하고, 추하며, 해로운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적인 원한’의 대상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적대의 정치에서 ‘정치보복’이 반복되는 이유다.

현재 우리 정치에서 심히 우려스러운 것은 적대의 정치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지 경험과 분단 모순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우리의 경우 ‘친일’과 ‘종북’ 프레임에 갇혀 적대적 관계가 지속해서 재생산되고 있으며,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지역주의에까지 스며들었다. 최근에는 젠더 및 세대 갈등까지 ‘공정성’을 명분으로 가세하며 더욱 ‘적대’가 심화하고 있다. 게다가 논쟁, 갈등, 혐오를 조장할수록 클릭수가 높아지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이런 적대를 더욱 부추기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점은 기득권 정치가 이런 적대를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기반으로 활용하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노동자의 파업을 두고 ‘북핵 위협과 마찬가지’라는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니 국토교통부 장관이 건설노조를 두고 ‘경제에 기생하는 독’이라며 서슴지 않고 적대하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 국가의 경제를 지탱하는 축인 ‘노동’이 ‘악하고’ ‘추하며’ ‘해로운’ 적이 된 셈이다. 이제 말을 듣지 않는 노동은 반드시 제거하겠다는 공개적 선언이 의기양양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존 롤스는 슈미트가 내세운 ‘적대 정치’에 명확히 반대한 정치철학자였다. 롤스에게 슈미트의 규정은, ‘내부의 적대’를 ‘외부의 적대’를 불러들여 무마하는 것에 불과했다. 만약 이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슈미트가 인정하듯 내부의 적대가 때로 ‘내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사례는 멀리 있지 않다. 2020년 미국 대선 뒤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이 대선 결과에 불복하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위대가 의회에 난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누구도 미국에서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후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해 미국에서 내전을 경고하는 언론 기사들이 지금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롤스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라면 이익과 가치가 다양할 수밖에 없고, 이런 이유로 극단적 분열이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열이 적대로 이어지는 것을 피하며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롤스는 적대를 피하며 동료 시민을 설득하는 일을 ‘시민다움의 의무’라 부르며, 이 임무를 일반 시민이 아닌 정치 엘리트들에게 부여한다. 모두 알고 있듯, 대표자의 임무가 적대의 조장이 아니라 갈등의 조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일반 시민의 결정적 임무는 적대에 기생하는 대표자들을 단호히 거부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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