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쇠퇴의 명백한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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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윤리적 진전에는 이로운 형태의 교조주의가 수반된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강간이나 고문이 용인돼야 하는지 논의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합법적 강간”이라는 것이 언급되고, 고문이 몰래 이뤄지는 것도 모자라 공개적으로 전시된다면 이는 그 사회가 윤리적으로 부패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그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빠른 속도로 가능해진다.
현재 러시아가 그렇다. 지난 11월 러시아는 바그너(와그너)그룹의 용병이었다가 우크라이나 편으로 전향한 한 남성을 처형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영상 속에서 그가 자신이 지하실로 납치당했다고 말하는 순간 뒤에 서 있던 남성이 그의 머리를 큰 망치로 내리쳐 살해한다. 바그너그룹의 창시자이자 블라디미르 푸틴의 최측근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이를 두고 “개가 개에 걸맞은 죽음을 맞은 것”이라고 언급했다. 러시아는 이슬람국가(ISIS)와 똑같은 처형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와의 동맹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있는 이란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란은 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체포, 처형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많은 미성년 여성도 포함돼 있다. 이란은 미성년자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지구상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결혼하지 않은 어린 여성을 사형 대상으로 보지 않은 이란법을 근거로 이란은 사형 전날 교도관이 여성과 강제 결혼하고 강간한 다음 사형시키는 만행을 수없이 저질러 왔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스라엘도 종교적 근본주의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한 테러리스트 바루크 골드스타인을 존경하는 극우 정치인 이타마르 벤그비르를 새 내각에 참여시키는 것이 그 증거다. 또 네타냐후는 유대인에게 가장 큰 위협을 가하는 이들은 극우세력인데도 엉뚱하게 무슬림, 좌파와의 싸움을 촉구한다. 네타냐후는 왜 극우 반유대주의에는 안심하는 것일까. 그 자신이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우는 반유대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을 무슬림을 막을 수 있는 장벽으로 보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를 확고히 지지한다.
불행히도 여기까지는 이야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 반대편에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좌파 역시 윤리적으로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모든 형태의 성적, 인종적 정체성에 관용을 설파하면서도, 그 자신들이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 돼 여러 규제를 요구하고 있다. 위반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아버지의 금지보다 어떤 의미에서 훨씬 강력한 이 금지들은 깨어 있는 시민을 자청하는 ‘워크’(woke)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팔로를 취소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의 모습으로 귀환한다.
워크와 캔슬 컬처는 ‘하나 없는 다수의 시기에 등장한 인종주의’다.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하나’의 단결을 위협하는 외부 침입자들(이를테면 이민자나 유대인)과 싸운다. 반대로 워크는 ‘하나’라는 오래된 범주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를테면 애국자, 가부장적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맞선다. 워크 좌파는 이런 야만주의에 반대를 선언하고는, 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야만에 직접 가담해 자신들의 억압적인 담론을 퍼뜨리고 실천한다. 이들은 다원주의와 차이를 지지한다면서도 극단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주체의 위치에서 발화하며, 논쟁을 허용하지 않고 자의적인 전제에 기반한 배제를 일삼는다.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에서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됐을 일들이다.
캔슬 컬처는 성소수자 개인들이 겪는 고통과 비극, 그리고 그들이 항시 노출돼 있는 폭력과 배제를 상쇄하려는 필사적이지만 명백히 자멸적인 시도다. 워크와 캔슬 컬처의 담론적 광신은 문화적 요새로의 후퇴, 가짜 “안전한 공간”으로의 후퇴다. 그것에 대한 다수의 저항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며 오히려 강화할 뿐이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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