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걷다 보면 해결된다

한겨레 2022. 12. 2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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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토포필리아]

서울 선유도공원 산책.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하나로 조율된다.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가을 학기 환경미학 강의 주제는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였다. 교실에선 ‘일상의 미학’으로 이름난 유리코 사이토의 책 세권을 읽고, 바람 부는 거리에선 두발로 지도를 그리며 쏘다니는 구성. 도시, 건축, 조경뿐 아니라 환경교육 전공자까지, 평소보다 많은 대학원생이 모였다. 수업의 절반을 길에서 헤맨다는 계획에 현혹된 게 분명하다.

강의계획서에 적힌 다섯곳 공원 이름을 보고 한 수강생이 물었다. 어떤 기준으로 고르셨어요? 사실 특별한 기준 같은 건 없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몇가지 느슨한 원칙이 있죠. 도시를 관통하는 선형 공원으로, 쉬면서 걸어도 두시간이면 충분한 6~7㎞ 코스. 관절에 무리가 없으려면 평지여야 하고요. 동쪽에서 서쪽으로 걸을 겁니다. 일몰의 세례를 놓칠 수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걷기를 마치는 지점에 시원한 맥주가 있어야 한다는 점.

경기도 시흥의 해변 공원에서 가을을 열었다. 배곧신도시 외곽을 따라 서해와 접한 경계에 조성된 배곧생명공원과 한울공원이다. 원래는 화약 성능을 시험하던 매립지다. 직선형 해안을 두시간 넘게 걸어도 전혀 단조롭지 않다. 걷는 방향 왼편으로 초고층 아파트가, 오른편으로는 바다가 펼쳐지는 파노라마. 해지는 쪽으로 무작정 직진하다 보면 갯내음이 말을 걸어온다. 해가 떨어졌다. 노을이 몸으로 달려든다. 높고 푸른 하늘이 보라에서 진홍을 거쳐 다시 주황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경기 시흥시 배곧한울공원에서 경험하는 서해의 낙조와 파노라마 풍경. 사진 배정한

서울 선유도공원을 향한 날엔 비바람과 함께 때 이른 강추위가 덮쳤지만, 세찬 가을비가 씻어낸 공원 풍경은 더없이 청명했다. 시간의 지층이 두텁게 쌓인 선유도공원은 어느 계절에 가도, 어느 시간에 걸어도 사색을 초대한다. <걷기의 인문학>에서 리베카 솔닛이 말한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편이 되는 상태”를 감각할 수 있다. 느릿하게 걷더라도 한시간이면 충분하다. 추위에 지친 학생들과 헤어진 뒤 몰래 공원을 다시 걸었다. 텅 빈 공원을 혼자 차지하는 기쁨. 탁 트인 한강 풍경이 실어나르는 바람소리에 미루나무가 고즈넉이 화답했다.

세번째 코스인 경의선숲길은 서울에서 가장 긴 공원이다. 끝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원효로에서 홍제천에 이르는 경의선숲길이 정답이다. 도시를 두동강 낸 철로 부지에 만든 공원이 도시를 잇고 엮는다. 걷다 보면 주변이 계속 변한다. 아파트 풍경이 숲을 이루는가 하면, 기찻길 옆 남루한 구옥을 고친 카페와 와인바, 떡볶이가게가 뒤섞인다. 70년대 양옥집과 90년대 다세대주택이 뒤엉키고, 높이 자란 나무 사이로 오피스빌딩과 쇼핑센터가 불쑥 튀어나온다. 양팔을 힘껏 흔들며 숲길을 가로지르면 활기찬 리듬으로 도시를 걷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다음 목적지 청계천에 수강생들은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커피 한잔 들고 산책하기엔 좋지만 좀 뻔한 거 아니냐는 반응. 청계광장에서 평화시장 정도까지라면 그들의 평가가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랑천과 만나는 청계천 하류에서 시작해 도심 방향으로 걸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용답역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표정은 생경에서 황홀로 급변했다. 넓고 거친 야생의 힘을 품은 청계천이라니. 지면보다 낮은 천변에서 도시 스카이라인을 올려다보며 풍경의 이행과 전이가 가져다주는 역동을 경험하면 서울이 달리 보인다. 직선 구간으로 접어들자 어둠이 내렸고, 도시의 불빛에 산책자의 그림자가 살아났다.

넓고 거친 청계천 하류의 야생 경관. 사진 배정한

겨울이 왔다. 우리는 언젠가 용산공원이 될 미군기지 서쪽 경계부를 걷기로 했다. 신용산역 아모레퍼시픽에서 출발해 용리단길과 삼각지를 거쳐 금단의 장벽을 끼고 한강대로를 따라 걸으면 남영동이다. 기지 철책 너머로 남산 풍광을 즐기며 걷다 보면 후암동이다. 용산공원 둘레길은 도시의 분더카머(Wunderkammer: 박물관의 전신 격으로,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해 진열한 공간)다. 식민지 시기 적산가옥과 아케이드, 남루한 초창기 아파트, 틀에 박힌 다가구주택, 현대식 첨단 건축, 감각적인 핫플이 시공간적으로 압축된 서울의 속살이다.

후암동 골목길을 걸으며 내 머릿속은 한 무리 만보객을 받아줄 맥주집을 떠올리느라 분주했다. 후암시장 한복판에서 우연히 찾아낸 재즈바가 우리를 환대했다. 아름다운 맥주와 라이브 공연에 상기된 학생들이 입을 모았다. 아, 교수님은 다 계획이 있었군요! ‘걷다 보면 해결된다’는 뜻의 라틴어 경구, 솔비투르 암불란도(Solvitur ambulando)는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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