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꽃피던 시절 없었겠소, 남겨야지요"
국민학교 통신표·도민증부터
박정희 대통령 手決 문서까지
122점은 국가기록물로 등재
#대학교 3학년 2학기 말 성적표. 그는 성적표를 볼 때면 당시 34세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조교수이던 고(故) 학현 변형윤 교수를 떠올린다. 당시 변 교수는 군 입대를 위해 휴학계를 내러 찾아온 자신을 말렸다. 대신 수리의 재능을 타고난 당신이 내가 개척한 수리경제학 강의를 맡아 주면 어떻겠느냐며 교수직을 권했다. 그러나 은사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가난이 싫었던 학생은 은행에 취직해 빨리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서산국민학교 6개년(1946~1951) 통신표.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학기제도는 변화무쌍했다. 1950년엔 6월 1일에 새 학기가 시작됐는데, 바로 그달 25일에 전쟁이 터졌다. 코로나 학사일정처럼 꼬여 한 학년 기간이 이듬해 8월까지로 늘었다. 1951년 9월 새 학기가 시작돼야 했다. 게다가 다음 해 '4월 학기제'가 계획돼 있었다. 4월 개학을 맞추기 위해 1952년 3월 일찍 학년이 끝났다. 한 학년이 7개월에 불과했다.
누군가가 살뜰히 챙기지 않았더라면 70년 격동기의 역사라는 그물망 틈으로 빠져나갔을 기록물 880여 종이 거대한 기록물집으로 지난 10월 1일 소리 없이 세상에 나왔다. '유노상·강명자 기록물집'이란 건조한 제목이 붙었다. 유노상 전 코리아써키트 부회장(83·사진)이 집필자인데, 국민학교 1학년부터의 통신표, 수업증서, 상장, 각급 학교 졸업증명서, 도민증, 병적 서류, 평생직장 은행 사령장, 일기장, 가족 간 서한 등이 책에 포함됐다. 그가 한국외환은행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파견 업무를 하던 시절 챙긴, 박정희 대통령이 수결(手決)한 기안 문서도 담겼다.
책은 도서라기보다 대백과사전에 가깝다. A4 크기로 총 574면, 무게는 3.1㎏. 유 전 부회장은 7년간 직접 기록물 목록을 정리하고, 사진을 찍고, 설명을 달았다. 880여 종 중 120점의 원본과 희귀한 2점의 사본은 2015년과 2016년 3회에 걸쳐 국가기록원에 기증돼 영구 보존되고 있다.
6년간의 국민학교 통신표를 비롯한 13여 점의 기록물은 2015년 국가기록원이 연 전시회 '나의 삶과 기록, 역사가 되다'에서 1년간 소개됐다. 당시의 학제 개편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지난 6월 유 전 부회장은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유 전 부회장은 금융계와 기업체에서 요직을 거친 노익장이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제일은행에 입행한 후 1967년부터 30여 년간 한국외환은행에서 일했다. 1996년엔 외환리스금융 대표이사 사장에 임명됐다.
70세가 돼 돌아보니 치열한 삶의 증거물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자기 삶의 흔적이며 징표라서 모아 두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 수많은 기록물은 한편으로는 개인 삶의 기록물이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와 국가의 거짓 없는 역사를 실증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중하고 아름답고 슬픈 과거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이효석 기자·사진/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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