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샤넬 '클미' 사니? 난 디올 남성 매장 가"
여성들 사이 희소성 있고 가격 부담 없어
"명품 남성 매장 여성 고객 5 : 5 비율"
가격 올려도 수요 급증..."제조된 희소성"
직장인 이은지(37·가명)씨는 최근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500만 원대 명품 가방을 구입했다. 그가 산 제품은 프랑스 명품 브랜드 디올의 남성 패션 '새들 소프트 백'. 가로 40㎝, 높이 29.5㎝로 다소 큰 편인데 평소 짐이 많은 이씨에겐 '보부상 가방'으로 제격이었다.
사실 이 가격대면 살 수 있는 여성용 가방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그럼에도 이씨가 남성 가방에 꽂힌 건 다름 아닌 "흔하지 않아서"다. 이씨는 "샤넬의 '클미(클래식 플랩백 미디엄)', 디올의 레이디백, 구찌의 홀스빗백, 셀린느의 트리옹프백 등 각 브랜드의 시그니처 백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들지 않는다. 외출할 때마다 같은 백을 든 사람들과 꼭 마주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초 샤넬이 가격 인상을 단행하기 전 샤넬 '클미'를 마련했다. 이른 새벽부터 '오픈런(매장 문이 열리기 전부터 줄 서서 대기하는 것)' 해서 어렵게 구입했다. 1,0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가방이지만 "실패 품목 중 하나"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제는 너무 "흔하디 흔한" 핸드백이 돼서란다. 결혼식 등 격식 있는 자리에는 여지없이 '클미'를 대동한 여성들이 즐비하기 때문. 지난 10월 직장 동료 결혼식에서 똑같은 '샤넬 클미 캐비어 은장' 백을 멘 하객 10여 명과 마주쳤을 정도였다.
이씨는 당분간 샤넬 가방은 구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값비싼 돈을 내고 샤넬 제품을 사는 건 그야말로 명품이라는 희소성의 가치까지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만큼의 가치가 있나 싶어 구매를 망설이게 된다"고 말했다.
디올·루이비통 등...남성 매장에 여성 고객이 더 많아진 이유
주부 김혜영(39·가명)씨는 지난달 생일을 맞은 남편과 함께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매장을 방문했다. 생일 선물로 핸들 소프트 트렁크백(423만 원)을 사주기로 한 것. 이 가방은 루이비통 특유의 모노그램 프린트에 보라색 핸들이 돋보이는 가방으로, 가로 21.5㎝ 세로 15㎝로 작은 편이라 크로스로 착용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김씨가 이 가방을 추천하고 선물하기로 한 건 "같이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는 손바닥만 한 샤넬 WOC(Wallet Of Chain·체인 달린 지갑) 백을 가지고 있지만, "미니백이 유행하면서 여성들의 필수품처럼 돼버렸고 데일리백으로 사용하기엔 이제 '흔한템(흔하디 흔한 아이템)'으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남성용 제품이다. 일단 여성들 사이에서 흔하지 않은 데다가 가격도 여성 제품들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그래서 김씨는 최근에도 디올 남성 매장에서 토트백을 구입해 남편과 같이 쓰고 있다. 캔버스 소재의 여성 가방인 디올 북토트백을 사려고 했으나 거리에서 너무 자주 보여 남성 가방으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남성용으로 출시된 디올 익스플로러 토트백(300만 원대)은 북 토트백(400만 원대)에 비해 많게는 100만 원 이상 저렴한 데다 디자인도 투박하지 않고 실용적이다. 남녀공용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명품관 남성 매장에는 여성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백화점이 명품 브랜드의 남성 전문 매장을 따로 두면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 지난 22일 오후 2시께 서울 소재 백화점 내 디올 남성 매장에는 여성 고객들이 매장에 비치된 가방이나 신발, 의류 등을 착용해보고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은 하이탑 스니커즈(160만 원대)를 구입했다.
디올 남성 매장 직원은 "예전에는 매장을 찾는 남성과 여성 고객 비율이 7 대 3이었다면, 최근에는 5 대 5 정도로 여성 고객들이 많이 방문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가방의 경우 디자인이 예쁘고 가격도 (여성용에 비해) 비싸지 않을뿐더러, 의류도 핑크 등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출시돼 여성이 착용하기에 부담이 없다"라며 "또한 남성 매장이 여성 매장보다 넓고 쾌적해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샤넬의 딜레마'...차라리 시즌백 산다
"샤넬 22백을 사긴 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들고 다니니 나중에 꺼내야겠어요."
구독자가 50만 명에 달하는 한 패션 유튜버가 한 말이다. 그는 명품 브랜드 제품을 구입해 '언박싱(구입한 물품의 포장 상자를 풀어보는 것)'하는 영상으로 유명하다. 이 여성 유튜버는 샤넬의 올해 신상품인 샤넬 22백 미디엄(780만 원대)을 구입했다. 그런데 들고 다니지 않고 집에 '모셔두겠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일까.
샤넬의 22백은 올초 출시되자마자 수많은 연예인과 인플루언서 등이 주목했다. 여자 연예인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는 22백을 메고 외출하는 사진이 게재됐고, 인기 유튜버들은 경쟁하듯 '22백 언박싱'을 보여주며 조회수를 올렸다. 여성들의 호기심과 시기심을 자극하며 22백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그러다보니 샤넬 매장을 가도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샤넬의 VVIP(최우수 고객)도 바로 구입하지 못하고 기다린다더라", "해외 매장에서도 겨우 연락받았다", "블랙이 없어 화이트로 사야만 했다" 등 22백과 관련된 사연들이 온라인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물량이 달린다는 22백의 도도한 입장이 달라진 듯하다. 한 여자 연예인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올초 구입한 샤넬 22백을 들고나갔더니 친구가 똑같이 메고 왔더라. 앞으로 22백은 그 친구와 상의해서 메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오래 대기한 끝에 비싼 값을 지불한 샤넬백을 눈치 보고 들어야 한다는 하소연이었다.
그야말로 '샤넬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샤넬백이 점점 대중화되는 기이한 소비현상과 점점 사그라드는 희소성 문제가 부각된 셈이다.
그래서 명품 관련 유튜버들은 "차라리 샤넬의 시즌백을 사라"고 조언한다. 시즌백은 해당 시즌에만 출시되는 백으로, 다른 시즌에는 나오지 않는 가방이다. 희소성을 확실히 챙길 수 있으니 '희귀템'이 될 수도 있다. 가격도 샤넬의 '클미' 등 스테디셀러 제품보다 낮은 편이다. 보통 500만~600만 원대인데 '클미'에 비하면 반값이다.
샤넬의 희소성이 무너진 건 팬데믹과도 연결돼 있다. 해외여행 등 길이 막히면서 명품 브랜드에 폭발적으로 분출된 이른바 '보상소비'가 작동한 결과다. 한 명품 브랜드 관계자는 "지난 3년간 샤넬의 '클미'가 어느 순간 '국민 백'이 돼버렸다"면서 "가격을 계속 인상해도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명품 브랜드는 내년에도 호황기를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희소성, 그게 뭔데?'...그래도 명품은 잘 나간다
샤넬은 올 들어 네 번이나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샤넬코리아에 따르면 현재 '클미' 가격은 1,316만 원, 클래식 플랩백 스몰은 1,237만 원, 라지는 1,420만 원이다. 이는 3개월 만에 올린 가격으로 '클미'의 경우 6.2% 상승했다. 2019년 11월(715만 원)과 비교하면 84%가 뛰었다.
샤넬뿐만 아니다. 에르메스도 내년 1월 품목별로 5~10% 가격 인상 계획을 발표했다. 이렇듯 명품 브랜드들은 매년 몇 차례씩 가격을 올리면서 소비자들이 익숙해지도록 길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소비는 줄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샤넬의 희소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해도 명품을 소비했던 사람들은 다시 명품을 사들이기 때문이다.
국내 백화점 매출만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경기 침체와 소비 둔화 우려 속에서도 백화점은 불황을 모르고 날아올랐다. 고가의 명품 소비가 급증한 게 그 이유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국내 백화점의 올해 3분기 실적을 보면, 롯데백화점의 경우 누적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4%가량 증가한 2조3,418억 원을 기록했다. 신세계백화점은 1조8,184억 원으로 전년 대비 21% 증가했고, 현대백화점은 1조6,942억 원으로 9% 늘어났다.
이른바 3대 명품인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가 입점한 백화점이 선전했다. '에루샤' 입점 점포가 4곳(본점·센텀시티·강남·대구)으로 가장 많은 신세계백화점의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29%로 가장 높았다.
실제로 신세계백화점의 전체 매출 중 명품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2019년 16% 수준에서 지난해 25%를, 올해는 26% 이상 차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 때문에 '명품=불패'는 '백화점=호황'으로 이어진다는 전망이다.
중국 상황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중국의 럭셔리 전문 매거진 징 데일리에 따르면 전 세계 명품 시장에서 중국의 비중은 2020년 20%, 지난해 21%를 차지했다. 매체는 "중국 내 명품 소비 증가로 인해 브랜드들이 가격 인상을 단행하고 있다"면서 "중국 명품 소비자들이 가격에 민감하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명품 브랜드가 가격을 올리는 것을 두고 "제조된 희소성"이라고 비판했다. 징 데일리는 "사람들이 명품의 가격 인상을 감당할 수 없을수록 더 많은 제품 수요가 있을 것"이라며 "이것은 장기적인 전략이기보다는 '제조된 희소성'을 창출하려는 시도"라고 비꼬았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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