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어떻게 사느냐 따라 단역도 주인공도 될 수 있죠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난다는 비유가 이토록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배우 김혜자의 두 눈을 자세히 보면 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다. 올해로 81세. 그러나 여전히 아기 같은 눈빛 앞에 서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을 듯이 안온해진다. 그뿐인가. 투명한 거울 같은 그의 눈빛은 너무나 깊어서 그의 연기에 오랜 시간 울고 웃었던 우리 모든 자신의 어느 날이 저 맑은 동공 안에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배우 김혜자가 생애 두 번째 책 '생에 감사해'(수오서재 펴냄)를 출간했다. 373쪽짜리 자서전에 가까운 책이다. 김혜자는 연기자로서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 이름 세 글자가 한 사람만의 이름에서 만인이 추앙하는 배우로 나아가는 길의 비화를 들려준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또 한 번의 출항을 앞두고 "생(生)에 감사하자"고 말하는 배우 김혜자를 23일 서울 충무로 한국의집 청우정에서 만났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우리들의 블루스' 마치고 반 년이 지났어요. 사실 한 작품 끝내면 말 그대로 '텅 빈' 상태로 지내요. 저 자신이 때로 매미 껍질인 듯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작품 이후 내 안의 뭔가가 다 빠져나가버린 것 같아서요. 지금은 텅 비어 있어요.
―배우란 비움과 채움이 연속된 과정이란 말씀으로 들립니다.
▷일등이든 꼴등이든 결승선에 도착한 마라톤 선수에게 힘이 남아 있다면 온 힘으로 달린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기를 할수록 느끼는 건데 정말 다 바치지 않으면 안 돼요. 더 이상은 한 마디 대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걸 걸어보고, 후회 없이 텅 빈 채 바닥에 폭 쓰러지는 거죠. 그때의 희열은 배우에게만 내려앉는 은총이에요.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이후 14년 만의 책입니다. 전작이 아프리카 아이들 옆에 선 인간 김혜자를 그렸다면 이번 책은 데뷔 61년차 배우 김혜자의 전생(全生)을 관통합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면 그 일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일 거예요. 돌아보면 연기는 제게 늘 두렵지만 동시에 가슴 뛰는 일이었어요. 전 연기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고, 연기는 곧 제 삶이었어요. 그래서 '배우로서 난 무엇을 추구했는가'를 한 번쯤 글로 써보고 싶었어요.
―깊이 없는 화보와 더 얕은 단상으로 팔할을 채운, 헛배만 부른 다른 산문집과는 결부터 다른 책입니다. 한 줄 한 줄 꼭꼭 씹어 소화시키면 보약이 되는 책이에요.
▷저는 연기하면서 너무 많은 인생을 경험했어요. 배역을 맡으면 집에서도 몇 달 동안 그 배역으로 살려고 노력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제게 연기란 배역을 무대나 세트장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역으로 '사는' 일이었어요. 수많은 배역을 맡다 보니 마치 수천 살의 인생을 살아온 것만 같아요. 어디에 제 나이 적을 땐 실제 나이 대신 '수천 살'이라고 써달라고 농담으로 얘기하기도 해요(웃음).
―'배역으로 산다'는 말씀이 와닿네요.
▷러시아 연극이론가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의 책 '배우수업'을 보면 연기자는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배역 그 자체가 돼야 한다고 나와요. 주어진 상황 이면에서 서사적으로 대본에 적혀 있지 않은, 배역의 빈 곳까지 채워넣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제가 그 배역으로 살아야 했어요. '우리들의 블루스'에선 강옥동이 너무 불행한 삶을 산 여자란 걸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집에 있으면서도 계속 우울하게 지낼 정도였어요.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이 제게 "이번 작품 시작하시고선 웃지를 않으시네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답했어요. "강옥동 그 여자는 웃을 일이 없는 여자예요." 전 어느 배역이든 '그 여자'가 돼서 살았어요.
―올 한 해 여러 드라마가 주목을 받았지만 '우리들의 블루스' 강옥동 역을 기억하는 시청자가 상당수일 겁니다. 불운했던 생, 균열, 그리고 화해. 인생을 담은 인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 아버지는 화재로 잃고, 오빠는 뱀에 물려 죽고, 태풍으로 남편 죽인 바다에서 딸까지 떠나보낸 여자잖아요. 그런 인생을 살아온 옥동에게 아들 동석은 행패 부리듯 시비를 걸어와요. 그렇게 옥동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죠. 옥동 배역을 수락할 때 '어쩜 이렇게 기구한 여자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는 여자'가 바로 옥동의 모습이었어요.
―배역을 맡으실 때 기준이 있을까요.
▷'아무리 인생의 속박에서 고통받는 역이라 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보는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역을 하고 싶지 않아요. 안 그래도 절망할 일이 많은데 내 배역으로 절망의 무게를 더할 수는 없잖아요.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하시고 탤런트로 먼저 배우가 되셨어요. 공백기 이후 1962년 펠리시앵 마르소 원작 '달걀'로 연극에 데뷔하셨습니다. 60년 넘는 세월에도 무결점 연기로 자신을 몰아붙이셨군요.
▷완벽한 연기, 완벽한 무대, 완벽한 작품이란 말을 우리가 자주 쓰지만 어떻게 인간이 완벽할 수 있겠어요. 그저 완벽함으로 나아갈 뿐이에요. 사실 생각해보면 저는 어느 배역이든 언제나 신인이에요. 매번 맡은 역마다 처음 사는 인생이고 또 처음 맡은 배역이니까요.
―영화 '마더' 촬영 때 모두 환호하는데도 연기가 마음에 차지 않아 화(?)를 내셨다고 책에 쓰셨습니다.
▷도준이(배우 원빈)가 엄마가 현장에서 흘린 침통을 주면서 '이런 거 흘리고 다니면 어떻게 해' 하는 신이었어요. 영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가 막힌 장면이잖아요. 그래서 지문에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라고 돼 있었는데 도대체 그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어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데 결국 봉준호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냈어요. '나한테서 더 이상 나올 게 없으니까 오케이를 했구나' 싶어 서럽게 울었어요.
―어떤 경지에 선 분의 모습 같습니다.
▷봉 감독이 나중에 그 상황에 대해서 '메시가 자기 축구 실력이 마음에 안 든다고 울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저도 많이 웃었어요. 과찬이에요. 완벽함이란 우리가 향해야 하는 멋진 과녁이에요. 대본을 받으면 100번쯤 읽어요.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요. 드라마는 녹화지만 연극은 길게는 몇 달간 매일 하니까 매일 연기가 다른데 99번을 읽어도 보이지 않던 것이 100번째에 보이기도 해요. 그러면 '어머, 어제까지 모르고 했네' 이런 생각이 들죠. 어제 오신 관객 분들께 미안해져요. 어제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했는데, 어제 왔던 분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죠.
―연기가 수행처럼 느껴집니다. 김혜자의 연기엔 김혜자만이 가닿을 이데아(idea)가 어른거리는 것처럼.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없어요. 저 자신을 잊고 몰입할 때 제 연기가 가장 좋았고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어요. 젊은 시절엔 어떤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반쯤 몽유병자처럼 살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신은 내가 몰입할 수 있도록 새 작품들을 계속 앞에 가져다주셨어요.
―'신의 대본에선 우리 모두가 배우'(11쪽)란 문장은 그렇게 쓰였군요.
▷신은 절대로 제가 경험한 일이 그냥 없어지게 하지 않으셨어요.
―많은 갈래의 예술 가운데 왜 연기, 배우였을까요.
▷고교 시절 영화를 미친 듯이 좋아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화를 봤어요. 탤런트로 뽑히고 나서도 아버지 권유대로 세계문학전집을 읽었죠. 읽지 않은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겠다는 생각으로요. 소설을 읽으면서 저 자신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많이 했어요. 현실에선 삶을 다 살아볼 수 없지만 상상 속에선 가능해요. 그 상상이 연기의 바탕이에요.
―맡지 못한 하나의 배역이 있다면요.
▷많은 분들이 '국민 엄마'로 저를 기억해 주세요. 감사하지만 그건 배우로서의 저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말이에요. 죽기 전에 장발장을 회개하게 해준 신부님 같은 할머니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안 생겼는데도 도망만 다니던 흉악범이 낡은 집 처마에서 오래된 풍금을 치는 할머니의 음악소리를 듣는 거예요. 연기할 땐 뭐든 상상하는 게 가장 즐거워요. 이 역할을 하려면 피아노를 쳐야 해요. 요즘엔 99세 할머니가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유튜브도 자주 봐요. 그러다 '요즘엔 효과음으로도 되던데 치는 척만 하면 안 될까' 이런 얌체 같은 생각도 한답니다(웃음).
―선생님께 연기란 무엇이었습니까.
▷제 영혼이 죽어서 제가 살아온 생을 돌아볼 수 있다면 어두운 소극장 구석에 앉아 작품을 한 편씩 돌려보고 싶어요. 제게 연기는 그런 거예요.
― 배우로서 느낀 고통이란 뭘까요.
▷고통보다는 드라마 배역에서 벗어나느라 힘들 때가 많아요. 강옥동 연기의 경우 그 여자가 너무 슬프게 죽기 때문에 죽은 연기를 할 때 눈물을 흘릴까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어요. 배역에서 벗어나면서 너무 힘들어서 코로나19도 두 번이나 걸렸어요. 연기에 만족했는지는 제가 아니라 제가 맡은 배역의 '그 여자'에게 물어봐야 해요. 제가 잘했느냐고 저도 늘 물어보고 싶어요.
―올해는 기쁜 소식도 많았지만 지극한 슬픔의 해이기도 했습니다.
▷뉴스를 보며 숨이 안 쉬어지는 걸 느끼고 눈물이 주륵주륵 쏟아지던 한 해였어요. 왜 우리는 살면서 이런 슬픈 일을 계속 겪어야 하는 걸까요. 그럼에도 세상은 결연한 의지로 움직이고 있어요. 슬퍼하면서도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내일을 위해 오늘 일을 하러 나가야 하죠. 그게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지탱해온 힘이기도 했으니까요.
―세상은 슬프면서 기쁘고, 기쁘면서 슬픈 부조리로 가득합니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이다'(56쪽)란 책의 문장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한 해를 열며 우리는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 모두는 '최고의 연기자'로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단역으로 만들 수도 있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게 만들 수도 있는 게 사람이에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구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 없이, 내 인생은 매 순간순간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란 문장을 가장 좋아해요. 때로 슬픈 대본이더라도, 때로는 기쁜 대본이더라도 우리 모두가 멋진 대본을 써야 하고 자기 생의 멋진 연기자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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