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3000명 이끌며 유연해져 …'Mr.엄근진'이 달라졌다
직원·고객과 터놓고 대화하며
그간 몰랐던 세상 배웠다"
'미스터 시리어스'(엄격·근엄·진지)는 잊지 못할 3년을 보냈다. 나라 경제를 걱정하며 밤낮 없이 뛴 것은 전과 같았지만, 1만3000명이 넘는 큰 조직을 이끌면서 유연함을 배웠다. 지점을 방문해 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토크쇼 MC를 자처하면서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한민국 중소기업 리스트를 읊으면서 몇 시간이고 자랑할 수도 있게 됐다.
학창시절부터 대를 이어 공직자로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36년간 정통 경제관료로 살아온 터였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파견으로 오랜 기간 해외에서 근무했지만 '한국 대표'라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愼獨)를 적용하곤 했다.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이코노미스트이자 거시경제 전문가라는 정체성도 그의 진지한 인생에 한몫했을 것이다.
윤종원 기업은행장은 "지점을 찾을 때마다 직원들이 따뜻하게 맞아줬고, 애로사항을 이야기하는 등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재임 중 150개 지점을 방문했는데 코로나19 거리두기로 더 자주 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또 "정부에서 일할 때는 잘 몰랐는데, 기업은행에 와서 보니 경쟁력이 탄탄한 중소기업들이 정말 많더라. 단순히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대표들이었다. 그분들이 일시적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자금을 지원하고 미래 투자가 필요하면 금융, 비금융 서비스로 백업만 잘하면 된다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K뷰티, 바이오, 연료전지 수송 기술, 오토바이 헬멧 등 국내 선도기업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서도 한참 이야기했다.
10년 만에 외부 출신 행장과 일하면서 조직도 변했다. 직원들을 가장 당황시킨 것은 "지난 60년간 기업은행이 없었다면 우리 중소기업들은 어떻게 됐을까"라는 윤 행장의 질문이었다.
한 기업은행 직원은 "국책은행으로 어떤 차별적인 역할을 해왔느냐고 묻는 것인데, 내 업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우리 소임을 다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냈고, 실행 과정에서 막히는 부분은 행장님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줬다. 덕분에 고객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마다 뿌듯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연임 포기 의사를 밝힌 윤 행장의 임기는 오는 1월 2일 끝난다. 아직 후임이 결정되지 않았지만 윤 행장은 난생처음 '슬로 라이프'를 누려볼 생각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기업은행장으로 지낸 3년의 세월을 책과 논문에 담는 일이다. 그는 "요즘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가 흥미롭던데, 저는 다시 돌아가도 공직을 택할 것 같다. 39년 동안 직업을 바꿀 기회가 세 번 정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계속 공직에 있기로 했다"면서 "큰 대과 없이 임기를 마무리할 수 있게 돼 너무 감사하고, 앞으로도 어디서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것"이라고 전했다.
[신찬옥 기자 / 문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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