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종합병원도 주말엔 소아청소년과 진료 중단··· 의료 공백 도미노 오나

김태훈 기자 2022. 12. 2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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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 진료 지연이 있을 수 있다는 공지문 현수막이 걸려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아과 의료진 부재로 소아환자 진료 불가.”

서울의 한 대학병원이 25일 중앙응급의료센터 종합상황판에 게시한 메시지다. 이 병원 응급실에선 주말을 맞은 지난 24일부터 소아청소년과(소청과) 의료진 인력이 없다며 진료를 중단했다고 공지했다. 서울의 다른 대학병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날 대학병원 세 곳은 주말이나 휴일에는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소아 응급 진료를 할 수 없다고 공지했고, 한 곳은 소아 심정지·외상 진료만 가능하다고 안내했다. 전국에 8곳뿐인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를 운영 중인 경기 성남시의 한 종합병원은 소아 응급 진료는 가능하지만 입원은 불가능하다고 알렸다.

인천 가천대 길병원이 이달부터 소청과 입원병동 운영을 중단한 데 이어 전국 병원들이 줄줄이 소청과 진료를 축소하고 있다. 저출생 추세가 불러온 소청과 기피 현상이 의료 공백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수도권 종합병원에서도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병원 현장에서는 소청과 전공의를 끌어오기 위해 소아 응급실 진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 일반화됐을 정도다. 의료계에서는 소청과 의원들이 문을 닫는 데 이어 큰 병원 역시 도미노처럼 소아 진료를 중단하는 사태로 번질 수 있다며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의료계에선 특히 소아 응급질환과 중증질환 진료 체계가 이미 상당 부분 무너져 있다는 점에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나마 사정이 낫던 수도권에서도 가장 ‘약한 고리’에 있던 한두 곳의 병원이 버티지 못하고 진료를 중단하면서 그 병원으로 향하던 의료 수요가 다른 병원으로 몰리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병원마저도 과중한 부담 때문에 의료 인력이 떠나버리는 사태가 연쇄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수도권의 종합병원에서는 이미 소아암, 희귀질환 같은 중증 진료의 경우 전문성을 갖춘 교수가 있더라도 보조인력이 부족해 결국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전원하게 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김지홍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이사장은 “생명을 다루는 노동집약적 필수 진료과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정책의 변화가 없어 전공의 기피 현상이 악화됐고, 고난도·중환자 진료와 응급 진료의 위축도 급속히 진행됐다”고 말했다.

서울과 수도권의 상급종합병원조차도 진료를 볼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은 그동안 지속된 저출생 현상으로 아동 인구가 급감하면서 소청과를 택하는 전공의 수가 급감한 데서 기인했다. 길병원의 경우 전공의 정원은 모두 12명이지만 현재원은 5명뿐인 데다 그마저도 4명은 전문의 취득을 앞둔 4년차들이다. 손동우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은 “4년차 전공의들이 전문의 시험 준비에 들어가면 2년차 전공의 한 명만 남는다”며 사실상 입원병동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밝혔다.

길병원뿐 아니라 전국 병원의 소청과 전공의 지원율은 매년 큰 폭으로 하락해 왔다. 2019년 80%에서 2021년 38%, 2022년 27.5%로 떨어졌던 지원율은 2023년도에는 15.9%까지 낮아졌다. ‘빅5 병원’으로 불리는 대형병원 중에서도 서울아산병원만 정원 8명을 모두 충원했을 뿐 나머지 병원들은 미충원 사태를 피하지 못했다. 수도권 주요 상급종합병원 중에도 지원자가 1명도 없는 곳이 적지 않아 전공의 지원자가 ‘0명’인 병원도 83.1%에 달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전공의 진로를 선택하는 의사들이 소청과를 기피하는 이유는 다른 진료과의 경제적 유인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전체 의원급 의료기관의 진료비가 꾸준히 상승하는 상황에서도 소청과 의원만은 최근 10년 동안 유일하게 진료비가 감소했다. ‘2021년 건강보험통계연보’를 보면 지난해 의원의 요양급여비용은 18조771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2% 증가했으나 소청과 의원에 지급된 진료비는 5134억원으로 1.6% 감소했다. 10년 전인 2011년보다는 24.7%나 줄었다. 소청과의 진료 대상 연령대 인구는 여전히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작지 않지만 전체 진료비 가운데 소청과가 차지하는 비율은 2.7%에 그쳤다.

이런 현실 때문에 소청과 전문의를 따고 의원을 운영하던 개원의들도 피부과 등 다른 진료과목을 내거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다. 서울의 한 소청과 개원의는 “코로나19 이후로 집중적인 타격을 입었다가 한동안은 코로나19 백신 접종 때문에 오는 성인 내원객 덕에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며 “이젠 주말 진료 시간이라도 늘려서 발길을 끌려 하고 있지만 다른 의원도 다들 비슷하게 대처하면 점차 쓰러지는 곳이 무더기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건당국은 소청과를 포함한 필수의료 지원대책을 내놓는 한편 길병원 등의 일선 병원을 대상으로 진료 재개를 촉구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길병원은 내년 1월 중 입원을 재개할 수 있게 진료 인력 확보에 나섰다는 안내문을 냈다. 다만 당국도 이 같은 단기적 대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전공의 부족 사태는 그간의 출생인구 감소 현상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며 “필수의료 지원 대책 중 소청과에 대한 구체적 지원방안은 현재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정부가 필수의료 지원대책으로 제시한 내용 가운데 수가를 올리겠다는 방향 외에는 세밀한 대책이 부족한 탓에 의료계에서는 관련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소청과 진료공백 우려 사태와 가장 연관이 깊은 전공의들이 몸담고 있는 의료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장시간 일하면서도 낮은 보수를 받는 전공의에 의존해 굴러가는 현행 구조를 바꿔 전문의들을 채용할 수 있게 충분한 재정이 지원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14일 성명을 내고 “소청과 전공의가 36시간 연속근무를 해가면서 당직을 채우는 것은 기형적”이라며 “특히 소청과는 소아 중환자실과 신생아 중환자실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충분히 예산을 배정하고 관련 수가를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종합병원과 상급종합병원은 비급여 영역이 거의 없어 수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청과 전문의 채용을 꺼리고 있다. 보건의료 시민단체에선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소청과 전문의를 채용하지 않는 병원을 상대로 단순히 수가 인상 방안만 제시하는 정부의 대책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수가가 인상되면 그 부담이 결국 건강보험 가입자에 전가되므로 공공의료를 확충하는 내용의 대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간 대형병원들은 연간 수백억원씩 흑자를 내면서도 필수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규모 경쟁만 하고 있다”며 “대형병원들이 적정 수의 전문의를 고용하도록 의무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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