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보면 티끌 같은 인간 … 혹독한 겨울 끝엔 언제나 '봄'
올해는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이 주춤하며 모두가 일상을 되찾아가는 한 해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다시는 지난 3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책들과 힘든 시기에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고 예술을 누리게 도와준 책들이 관심을 모았다. 매일경제와 예스24는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올해의 책' 4권을 골랐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으로 포장돼 있지만 실제로는 삶의 질서를 말하는 인문 에세이다.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보디상 (Peabody Awards)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 룰루 밀러는 생물 분류학자이자 미국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를 통해 절망의 시기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다. 조던은 유년 시절 과일이 매달린 농장에서 별을 보며 자랐다. 혼란스러운 천체운동은 소년에게 '무질서 속의 질서'라는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천문 그림이 적힌 책을 5년쯤 탐독한 뒤 소년은 하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문에 대한 관심은 지구 위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는 생명이 거대한 나뭇가지 형태로 뻗어나가며 서로 연결돼 있다고 보고 그 관계를 밝혀내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가 발견해 직접 이름 붙인 물고기 수는 당시 인류에 알려진 어류의 5분의 1에 달했다.
이 책의 묘미는 조던을 신화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독살 사고에 연루됐고, 우생학자로도 악명을 떨친다. 그의 선택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했다. 책은 우월한 종의 존속이라는 조던의 집착 때문에 인간이 얼마나 비정해질 수 있는지를 다룬다. 조던이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던 이유가 평화가 아닌 우수한 종자의 상실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책 제목은 조던이 수많은 차이를 가진 어류를 한 단어 아래 몰아넣는 오류를 범했음을 은유하는 저자의 문장이다. 조던은 온갖 생물을 하나의 '진화적 범주'에 집어넣어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논리는 우생학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전기이면서 회고록이자 과학적 모험담인 이 책은 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곰출판 펴냄.
▷ 왼손잡이 우주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왼손잡이 우주'의 목표는 왼쪽과 오른쪽을 구별하는 것이다. 책은 1964년 마틴 가드너가 비대칭 물체나 구조가 없다는 가정하에 왼쪽·오른쪽을 구별하는 질문을 던진 '오즈마 문제'로 시작한다. 외계 생명체에게 오른손을 설명하는 질문에 당황할 새도 없이 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거울 대칭, 전하와 자하, 전기와 자기의 오른손 법칙, 마흐의 충격, 전자와 양성자 등 여러 가지 물리적 개념이 쏟아져 나온다.
이 중 거울 대칭은 물리학자들이 신격화해 왔던 개념이었다. 물리학자는 자연이 왼쪽과 오른쪽을 차별하지 않아서 왼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오른쪽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56년 '중성미자'라는 입자가 왼쪽으로만 돌아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거울 대칭 이론은 무너졌다. 이는 우주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비대칭적이고, 자연이 왼쪽과 오른쪽을 차별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학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신은 왼손잡이였다"며 탄식했다.
파울리 말처럼 자연은 왼쪽과 오른쪽을 차별하는 왼손잡이일까. 저자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는 것이 세상에서 재미있는 게임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며 책을 탐구할 것을 요구한다. 입자물리학과 끈이론을 연구하는 저자는 중성미자 발견에 그치지 않고 우주의 심오한 비밀을 향해 한 걸음 더 걸어간다. 나아가 새로운 오즈마 문제와 과거와 미래를 뒤집는 시간 역전 대칭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세계로 독자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최강신 지음, 동아시아 펴냄.
▷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 중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물체는 1977년 미국에서 발사한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다. 지구를 떠난 지 약 20년 후 보이저 1호는 지구에서 약 61억㎞ 떨어진 명왕성 궤도에 이르렀다. 그때 그곳에서 보내온 사진은 광활한 우주 속에 빛나는 점 하나였다. 인류 역사상 길이 남은 그 사진 속 빛은 바로 지구의 모습이었다. 광활한 우주 속 점에 불과한 지구를 보면서 인간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실망하는 사람이 많다. 이토록 작은 지구 위에서 지구보다 훨씬 작은 존재로 살아가면서 인생의 덧없음에 허무함을 느끼기도 한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습니다'는 이런 사람들에게 모든 존재가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다독인다. 인간은 허공으로 가득한 우주의 아름다움을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깨친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몸은 원자로 구성돼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뀐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우연으로 만난 원자들의 짜임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우리 모두 티끌처럼 사소하지만 태산 같은 무거움을 지닌 특별한 존재들"이라고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 책은 물리학자가 인간 삶 속에 숨어 있는 과학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책이다. '처음' '흐름' '허공' '사과' '무게' '떨림' '틈새' 등 42개의 단어로 과학과 삶이 이어져 있음을 설명한다. 허공과 다름없는 원자 내부를 들여다보다가 원자로 이뤄진 우주를 이성의 힘으로 깨달은 인간의 경이로움과 만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삶 속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 과학적인 순간과 같다. 김범준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는 현존하는 최고의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와 그와 오랫동안 함께한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의 대화를 담은 책이다. 예술가와 평론가로 역할은 다르지만 예술로 하나가 돼 서로를 존중해온 두 사람은 함께 보낸 시간만큼 진화한 예술적 감성을 대화로 녹여냈다. 책은 2019년 호크니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봄을 맞기로 했다는 계획을 밝히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노르망디의 아름다운 자연과 햇빛에 반해 작업실 '그랑드 쿠르'를 구한 행위가 호크니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루며 점점 범위를 넓혀간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작업을 시작하고 해가 지는 저녁 잠자리에 드는 호크니 모습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소박함이 느껴진다. 60년 넘게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것은 그가 노르망디에서 보낸 것처럼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담은 그림은 일상의 소중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이 소박한 일상을 통해 호크니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고통에도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춘 순간에도 호크니는 "예술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라며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에서는 호크니뿐 아니라 피카소, 고흐, 모네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호크니와 게이퍼드는 미술은 물론 바그너의 음악, 소설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나 줄리언 반스까지 호크니가 매혹된 예술에 관해 끝없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고 거장들과 호크니 작품을 자유롭게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데이비드 호크니·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시공아트 펴냄.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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