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발견한 삶 … 세상을 이해하고 현실서 해방됐다
자신 혹은 타인을, 더 나아가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런데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행위는 이해의 경지에 가닿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란 점에서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과정이 곧 삶이자 사랑이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나 위로의 순간이 되기도 하므로. "영원히 알 수 없다면, 영원히 공부해야 한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책 '인생의 역사')의 말처럼, 올해도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남긴 명저가 많았다. 매일경제와 예스24가 선정한 '올해의 책'은 그중 5편의 소설과 에세이를 소개한다.
▷ 아버지의 해방일지
한때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주인공 '아리'는 고향 구례로 와 3일간 장례식을 치르는데,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이 지인들의 말을 통해 구체화되는 경험을 한다.
거기엔 해방 이후 70년 현대사의 질곡이 녹아 있다. '좌파 빨갱이'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아버지의 소학교 동창 '우파' 박 선생, 아버지의 친구를 자처하는 샛노란 머리의 베트남 혼혈 열일곱 살 소녀, 집안의 몰락을 평생 형 탓으로 여겨온 작은아버지 등 입체적인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이야기는 시종 유쾌하고 매력적이다. 올해 9월 출간된 뒤 순식간에 몰입해 읽으며 울고 웃었고 다 읽은 후엔 먹먹함이 가시지 않았다는 간증이 이미 독자들 사이에 파다하다.
저자는 앞서 1990년 실화에 기반한 문제적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낸 바 있다. 이번 소설 역시 실제 부모님을 모델로 삼았다. 2008년 실제 부친상을 당한 후 구례에서 노모를 보살피며 지내고 있다. '작가의 말'을 통해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아버지의 '십팔번',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고 내뱉은 저자의 고백은, 이 책이 아버지의 해방일지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 수많은 자식을 위한 해방일지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정지아 지음, 창비 펴냄.
▷ H마트에서 울다
한국어를 따로 배우진 않았다. 1989년 한국인 엄마와 유대계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 그러나 엄마가 해주는 한국 음식을 먹고, 엄마가 좋아하던 한국 노래를 듣고, 사춘기엔 엄마의 한국어 잔소리를 견디며 컸다.
그렇게 나를 이루던 엄마가 어느 날 암 판정을 받는다. 저자가 아직 스물다섯 살일 때다. 엄마를 다 안다는 듯 굴었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은 없었던 애증의 관계. 엄마를 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기다려주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투병 생활은 길지 않았다. 아시안 식품 마트를 헤매던 저자는 묻는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이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사 먹던 김이 어디 거였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내가 여전히 한국인이긴 할까?"
책은 떠나간 엄마를 온전한 인간으로 기억하기 위한, 상실의 아픔을 버텨내기 위한 기록이다. 저자는 유튜브 요리법을 따라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그리움을 달랜다.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선다. 교양지 '뉴요커'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책으로 엮어 지난해 미국에서 먼저 출간했고, 올해 낸 한국어 번역본 역시 감동적 찬사를 받았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문학동네 펴냄.
▷ 인생의 역사
2008년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이후 2014년, 2018년 줄곧 베스트셀러를 써온 저자의 4년 만의 신간, 첫 시화집이다.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이름난 그가 "내 글쓰기의 원형"이라고 선언한, 시와 인생에 대한 헌사다.
시를 읽는 방법론에 대한 글은 아니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오랜 시간에 걸쳐 '빈 바구니'에 이것저것 담았다 비워내는 인생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내가 조금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고 말한다. 올해 아버지가 된 저자가 사랑을 '조심하는 마음'에 빗댄 대목에선 어린 자식에 대한 애틋함과 결연함마저 읽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22'를 통해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비대칭성, 더 나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읽어낸 것. 결국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는 데로 나아간다.
이 밖에 작자·연대 미상의 '공무도하가'부터 에밀리 디킨슨, 윤동주, 최승자, 이성복 등 동서고금 불멸의 시를 여섯 개의 인생 화두로 나눠 다룬다. 신형철 지음, 난다 펴냄.
▷ 배움의 기쁨
사람은 환경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힙합 음악에 젖어 배움을 멸시하던 한 흑인 청년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재즈를 들으며 해방감과 환희를 느끼게 되는 데까지 겪었을 환경의 변화는 쉽게 짐작도 가지 않는다. '가장 도발적이며 진보적인 문화비평가'로 불리는 저자의 회고록에 그 생생한 경험담과 비평이 담겼다.
그는 미국 뉴저지주의 작은 마을 팬우드에서 자라며 겪은 흑인 힙합 문화의 변질이 자신뿐 아니라 흑인 사회 전체를 옭아맸다고 비판한다. 흑인 음악이 한때 억압과 차별에 맞서 자유와 혁명을 노래하던 시기를 지나, 1980년대에 들어선 폭력성과 허영을 과시하고 배움을 두려워하는 관습을 '흑인다움'에 덧입혀 버렸다는 것이다. "힙합은 그 성질상 기본적으로 이 세계와 진지한 관계를 맺는 데 장애물"이라고까지 일갈한다. 그의 비판이 논쟁적인 것은 흑인 사회 내부로부터 터져 나온 고발이란 특수성 때문이기도 할 터. 그것은 저자의 특별한 아버지 덕분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극심한 인종 차별을 겪었지만 집에 1만5000권에 달하는 책을 쌓아놓고 언제나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입지전적 인물. 아들이 흑인 사회 또래들이 흔히 겪던 자조의 늪에서 빠져나오길 바라며 가르침을 계속했다.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지음, 김고명 옮김, 다산책방 펴냄.
▷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일흔 살을 목전에 두고 있던 저자가 쓴 글 '실버 취준생 분투기' 마지막 대목이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20년 넘게 살면서 할 도리를 다한 그는 황혼 이혼을 결심했다. 같은 글에서 "어쩌면 나를 찾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자식들이 장성한 인생의 후반기 60대에, 문학이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좇으면서, 노인으로서 취업 현장에서 갖은 수모를 겪은 경험을 치열하게 남긴 글이다. 창작하는 삶을 향한 갈증, 절대 꺼지지 않는 열의가 많은 사람의 마음에 절절하게 닿았다.
지난해 한 문학상의 논픽션 부문에 당선되며 뒤늦게 높은 관심을 받았는데, 저자는 수상 직후 영면에 들었다. 이 책은 유가족이 남은 글을 추려낸,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됐다. 선천적 감각신경성 난청 장애, 유년 시절의 가난과 결혼 생활 내내 견뎌야 했던 남편의 폭력,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사유 등은 나약한 자기 연민이 아니라 먹먹하고 단단한 삶의 이야기로 기록됐다. 평생을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온 저자는 이웃들의 고통과 상처 많은 삶도 애틋하고 묵직하게 바라본다.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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