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해도 작은 희망과 당신 곁 사랑이 있기에 우리 삶은 그대로 소중한거야
문학은 현실의 저 너머를 보는 반성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멀어지는 반(反)현실에 기반한 초월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은 그 어떤 방향으로든 우리 자신에게 치유와 안식의 감정을 건넨다. 2022년 서점가 매대를 찾은 무수한 문학 작품 가운데 삶은 다시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강력한 상상의 힘을 건넨 다섯 권의 문학 작품을 매일경제와 예스24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작가의 새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제목과 달리 평범하지 않다. 시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미래로 향해가는 직선적인 시간관에 익숙했고, 혹 삶과 죽음이 맞물리며 윤회하는 순환적 시간관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런데 김연수의 이 작품은 시간의 역방향성을 암시한다. 스물한 살인 '나'와 지민은 종강 파티가 끝나고 외삼촌이 편집자로 일하는 출판사로 향한다. 지민의 엄마가 스스로 이승을 떠나기 전인 1970년대 집필한 소설 '재와 먼지'가 어떤 내용의 책인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외삼촌은 오래전 '재와 먼지'를 읽었다. 외삼촌은 출간이 금지돼 이제 구할 수 없는 이 소설의 내용을 '나'와 지민에게 들려준다.
동반자살을 선택하는 한 연인의 이야기가 '재와 먼지'의 줄거리였다. 문제는 연인이 삶을 끝낸 이후 다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동반자살을 한 날이 인생의 새로운 첫날, 자고 일어나면 그 전날이 되는 식이다. 사실 '나'와 지민은 함께 죽음을 택하려 했던 터였다. 그런데 수십 년 전 죽은 엄마가 쓴 소설이 두 사람의 삶을 예고한 것만 같아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김연수의 팬이라면 이 문장을 오래 붙잡게 된다. 김연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사랑하지 않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시인이 올해의 시집으로 꼽은 '시인들의 시집'이기도 하다.
시집의 표제는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 '청혼'에서 왔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로 시작하는 한 페이지 짧은 시인데 '나'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너'의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주고,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했던 맹세를 찾아 '너'의 팔에 적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삶이란 충만한 빛으로만 채워지지 않아서 때로 물컵에 슬픔이 담긴 쓴잔을 마셔야 한다. 그 슬픔은 '투명한 유리 조각' 같아서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미지의 슬픔이다. 청혼 이후 절망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 일련의 과정이 모든 사랑의 과정임을 진은영 시인은 고요히 주장한다. 시 '남아 있는 것들'은 좀 더 담담하게 시인의 걸어갈 길을 일러준다. 끄적거린 시들은 별 볼 일 없지만 매일 무엇을 끄적이는 시인이 있다. 시의 기슭에선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가 저물녘에 이르러 다시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반복된다. 결국 시인은 '잘 묶인 매듭처럼 반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을 경험한다. 삶과 죽음, 그 안에 놓인 시의 운명을 진은영 시인은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진은영은 그런 것을 가졌다"(평론가 신형철)는 평을 받았다. 진은영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 녹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의 독특한 책이다. 앤 카슨은 오빠의 사망 이후 완벽한 절망으로 진입하는데 그 감정을 책으로 승화했다. 그런데 이 책은 오빠를 향한 문장으로 이뤄진 헌사를 넘어 책의 형식 자체를 질문하는 일종의 묘비처럼 느껴질 정도다. 전에 없던 형식과 내용에 세계 독자들이 크게 호평했다. 사각형 박스에 들어 있는 앤 카슨의 책 '녹스'는 책 전체가 한 장의 종이로 이뤄져 있다. 종이를 좌우로 접으면서 벽돌책이라 일컬어도 마땅한 한 권의 아코디언 같은 책이 완성됐다. 책에는 앤 카슨이 오빠와 나눈 작은 쪽지나 사전의 낱말이 붙어 있고 시인은 문장으로 구성된 사물에 관한 단상을 함께 적었다.
가령 'ave'라는 단어를 두고 앤 카슨은 아마도 카르타고어로 추정되는 이 단어가 동사 'aveo'에서 파생된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인사말에서는 "잘 지내! 잘 가! 행복해야 해!"라고 해석되고, 묘지 장식물에서는 "이제 밤이다"라고 읽을 수 있다고 쓴다. 이런 단어가 적힌 종이를 찢어 붙이고 이에 자기 생각을 담는 행위 자체가 시가 될 수 있음을 앤 카슨은 이야기한다. 책 제목 녹스(nox)는 로마신화에서 '밤의 여신'을 뜻하는 단어다. 하지만 정확히는 '일몰과 일출 사이의 시간'을 뜻하는 말로, 죽음, 어둠, 음울, 밤의 상황을 상징해낸다. 앤 카슨 지음, 윤경희 옮김, 봄날의책 펴냄.
▷ 믿음에 대하여
올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로 선정돼 한국 독자를 깜짝 놀라게 했던 박상영 소설가의 '믿음에 대하여'는 '박상영 사랑 3부작'의 최종판이다.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큰 반향을 얻었다. '대도시의 사랑법' '1차원이 되고 싶어'에 이어 30대의 고충을 담아낸 소설로 중심인물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네 편의 중단편을 엮었다. 김남준, 고찬호, 유한영, 황은채가 소설의 중심인물이다. 표제작 '믿음에 대하여'는 임철우의 시선을 다룬다.
애인 Y의 장례식장에서 철우는 Y가 실은 자신을 배신했었음을 알게 된다. 사진작가였던 임철우는 창작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는 사진 작업을 그만두고 이태원에 이자카야를 차린다. 그는 Y가 자신을 등졌던 지난 삶을 떠나보내며 Y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유한영과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절망은 이어진다. 이태원발 코로나19 확진 사태가 발생하자 삶은 냉혹하게 철우를 갉아먹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어놓은 돈을 전부 까먹고 보증금에서 월세를 공제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영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또다시 믿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언제고 깨어지고 흩어져버릴 유리 조각 같은 믿음에 대해서." 깨지는 믿음은 30대를 걸어가는 우리 모두의 기분을 닮았다. 박상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22년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의 대표작이자 20세기 최고의 문학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올해 12권과 13권이 함께 출간되며 민음사판이 완간됐다. 주인공은 김희영 한국외대 명예교수로, 프루스트 전공자인 김 교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에 10년을 매달려 결국 해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권인 13권 '되찾은 시간'은 질베르트의 초대를 받아 화자가 콩브레 근방 탕송빌성에 체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과거 콩브레를 산책하며 품은 꿈이 하나씩 무너지는 걸 보면서, 공쿠르의 미발표 일기를 읽으면서, 마르셀은 자신이 오랜 세월 꿈꾼 문학이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재능 부족으로 글을 쓸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며 삶과 문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우울증에 빠진다.
이후 화자는 문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일련의 비의지적 기억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문학 작품의 모든 소재는 내 지나간 삶"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가면무도회'에 들어가는 순간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나 드디어 피로와 승화의 절정에서 긴 여정을 마감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민음사 펴냄.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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