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뛰는데 한국은 걷는 셈"…반도체 위기 외면한 국회
일명 '반도체 특별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용두사미로 전락했다.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공제율을 기존 6%에서 8%로 2%p(포인트) 상향하는 데 그쳤다. 업계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쟁국이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내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당초 추진한 정책마저 역행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된 개정안에는 대기업이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국가첨단전략산업에 시설 투자하는 경우 투자금액의 8%를 세금에서 공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존 세액공제율은 대기업 6%, 중견기업 8%, 중소기업 16%였다. 중견·중소기업 세액공제율을 그대로 둔 채 대기업만 2%p 높인 것이다.
당초 논의됐던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여당은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반도체 초강대국' 캐치프레이즈에 맞춰 2030년까지 세액공제율을 대기업 20%, 중견기업 25%로 높이자는 입장을 내놨었다. 하지만 야당이 재벌 특혜라며 반대해 심사가 지연됐고, 이어 기획재정부가 여당 안이 통과되면 2024년 법인세 세수가 2조6970억원 감소할 것이라며 난색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여야는 4개월을 끌다 정부안으로 합의를 이뤘다.
개정안 통과 직후 반도체 특별법을 주도한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입장문을 내고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는 25%"라며 "(여야가 합의한) 8%는 전진이 아니라 후퇴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한국에서 쫓아내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업계에서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세액공제율 8%는 주요 경쟁국과 비교해 크게 낮다. 미국은 지난 8월 공포된 반도체과학법(칩스법)을 통해 설비투자하는 기업에 세액을 25% 감면해주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기업인 TSMC가 있는 대만은 현지 기업의 R&D(연구개발)·설비투자 세액공제율을 기존 15%에서 25%로 높이는 개정안을 최근 발의했다. 중국은 향후 5년간 현지 반도체 기업에 1조위안(약 183조 3400억원)을 지원하는 패키지를 내년 1월 시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세계가 뛰는데 한국은 걷겠다는 셈"이라며 "같은 금액으로 더 많은 공장을 짓고, 인재 유치에 더욱 공을 들일 수 있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느냐"라고 우려했다. 첨단 반도체 라인 하나를 짓는데 통상 20조가량이 투입되는데, 이를 단순 계산하면 한국기업이 6개 라인을 지을 때 해외 경쟁기업(25% 세액공제 적용)은 7개 라인을 신설할 수 있다.
국회와 정부가 근시안적 경제적 효율성에 매몰된 결과란 지적이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산업 경쟁력에서 선두에 서 있는 지금이 가장 효율적으로 기업을 지원할 수 있는 시점"이라며 "산업이 잘못된 이후의 손해와 회복 비용은 막대할 것이다. 경쟁국이 선진국가라 회복 자체가 불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도 "미래산업 주도권을 확보한 뒤에 세수를 늘릴 수 있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한국 기업들이 해외로 발길을 돌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메모리반도체 생산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해외로 향하면 국내 채용 시장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다. 기술 유출 가능성도 커진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더 많은 혜택을 받는 지역에 투자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서 "최근 리쇼어링(해외에 적을 둔 기업이 자국으로 복귀하는 것)이 활발한 미국에서 경기 부양 효과가 나타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번 국회 결정에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이 이미 불리한 환경에서 뛰고 있다는 점은 우려를 키운다. 벌어들이는 수익 대비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세금으로 내는 형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한국 법인세 부담률은 지난해 기준 26.9%로 미국(13%), 대만(12.1%)의 2배 수준이다. 한국이 2018년부터 법인세 증세 기조를 이어온 반면, 미국 등은 법인세율 인하와 투자촉진책 등 감세 정책을 펼쳐온 탓이다.
업계 한 인사는 "한국이 특히 강점을 가진 반도체 생산 부문에서는 매해 대규모 첨단설비 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면서 단가를 낮추는 경쟁이 핵심"이라며 "시각을 넓혀 경쟁력 높은 해외 반도체 기업들을 국내에 유치하기 위해서도 세액공제란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국회와 정부가 세액공제 비율 확대 논의를 이어가길 기대한다"라고 덧붙였다.
오문영 기자 omy072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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