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따뜻한 경제학’ 기틀 마련한 거인
“우리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해온 이면에는 근로자와 농민의 희생이 있다. 정부는 성장의 혜택이 사회에 골고루 퍼지도록 앞장서 노력해야 한다.”
1988년 5월29일 <한겨레논단>에서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서울사회경제연구소 명예이사장)는 이렇게 썼다. 칼럼 제목은 ‘성장의 그늘에도 햇살을 비추자’였다. 25일 95살을 일기로 별세한 변 명예교수는 한국에 ‘따뜻한 경제학’의 기틀을 마련한 경제학계의 거인이다. 1960년 서울대 교수 신분으로 4·19 혁명에 참여하고 1980년 서울대교수협의회 회장으로서 시국선언에 앞장 섰다가 해직됐다.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한 주류 경제학자, 경제학의 사회 참여와 실천을 가르친 불같은 성품의 스승으로 제자들은 고인을 기억한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민주 항쟁이 있었던 1987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변 명예교수 조교로 일했다. 이 의원은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으로 북쪽에 있는 가족들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늘 참으셨다. 혹시라도 북한과 연이 있다는 구설이 오르면 전체 진보 진영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늘 몸을 삼가셨다. ”
변 명예교수는 1927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입학해 서울상대를 졸업했다. 1955년 모교 상대 교수로 부임해 경제학이 자리 잡지 못한 국내에 경제수학, 통계학, 수리경제학, 계량경제학 등을 도입하고 가르쳤다. 전공은 주류 경제학이지만, 효율과 성장을 중시하는 시장 만능주의에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한겨레 창간 초기 그가 연재한 칼럼에 온전히 녹아있다.
1988년 8월25일 ‘셋방살이 설움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변 명예교수는 정부의 부동산 투기 정책을 강력하게 질타했다. “부동산 투기 대책이란 투기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부동산 가격 안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유에서다. 저소득 도시 서민을 위한 저렴한 공공 임대주택 공급, 근로자 임금과 근로 조건·작업 환경 개선, 경제 민주화 등 그가 펼쳐온 주장은 현시점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의원은 “선생님의 시선은 항상 아래를 향했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하셨다”고 말했다. 변 명예교수는 영국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이 남긴 “경제 학도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져야 한다”는 경구를 1992년 서울대 퇴임 고별 강연에서 다시 강조했다.
변 명예교수가 37년간 가르친 제자들은 ‘학현학파’로 불린다. 서강학파, 조순학파와 함께 한국 경제학계의 3대 학파로 꼽힌다. 학현은 ‘배움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변 명예교수의 호다. 노무현 정부의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문재인 정부의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 박복영 청와대 경제보좌관, 강신욱 통계청장, 원승연 금융감독원 부원장, 그리고 주상영 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등이 학현학파 출신이다. 그러나 정작 변 명예교수 본인은 숱한 제의에도 한 번도 공직에 오르지 않았다. 자리를 탐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며 후학에게 모범을 보이겠다는 이유에서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는 “선생님은 수업에 1분만 지각해도 불호령할 정도로 깐깐하고 무서웠지만 정의롭고 불의를 절대 참지 않는 분이시기도 했다”며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해지며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들이 최근 중시하는 분배 문제를 1970년대부터 강조했던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이라고 했다.
그는 한겨레 창간의 큰 언덕이었다. 1987년 10월12일 종교계의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함석헌 선생, 문학계의 김정한, 박경리, 황순원 등 각계 원로 23명과 함께 한겨레 신문 창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돈 많은 사람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권력의 간섭에서도 벗어나 국민의 돈으로 살림을 시작하는 신문은 일찍이 언론의 역사에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한겨레는 변 명예교수의 업적을 기려 만든 ‘학현학술상’을 공동 주관하고 있다.
유족으로 아들 변기홍씨, 딸 변기원·기혜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 27일 오전 9시이다. (02)2072-2018.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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