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이브 220명 몰려왔다… 백사마을 녹인 9000장 연탄 기부 행렬
“아이구, 이 추운 날에 몸이 다 얼겠구만. 고마워서 어떡해.”
24일 오전 11시쯤,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 주민 김향심(67)씨가 무게가 1kg인 지게에 연탄 12장을 싣고 온 김희원(32)씨와 황지원(27)씨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김향심씨 집 한 켠에 연탄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던 두 사람의 머리카락 끝에는 땀이 얼어 고드름처럼 맺혀 있었다. 두 사람은 도합 45kg 무게를 등허리에 짊어지고 마을 골목을 수차례 왕복한 터라 팔과 어깨가 저리다면서도, 뿌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날 두 사람을 비롯해 연탄은행에서 모은 봉사자들은 김향심씨가 겨우내 쓸 연탄 300장을 배달했다. 김향심씨는 “오래된 집이라 하루에 연탄을 10개씩 때야 겨우 냉기를 막을 수 있다”며 “매년 잊지 않고 이렇게 연탄을 가져다 주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사회복지단체 연탄은행은 백사마을에서 ‘성탄데이’ 연탄 배달 행사를 열었다. 이번 행사에는 강원 원주시와 경기 화성시 등 전국 곳곳에서 온 220여명의 봉사자가 참여했고, 이들은 백사마을 33개 가구에 연탄 9000장을 전달했다. 연탄은행은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성탄데이 행사를 열고 있지만, 이번처럼 전국에서 수백명의 봉사자를 모아 대대적으로 행사를 벌이는 것은 코로나 이후 3년 만이다.
연탄은행 측은 이번 행사를 통해 연탄 기부 분위기가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연탄은행은 매년 연탄으로 난방을 해결하는 취약계층 가구를 위해 연탄을 기부받고 있는데, 올해에는 크리스마스 직전까지도 목표인 300만장에 100만장 못 미치는 200만장 정도만 들어왔다고 한다. 지난 9월부터 지난달까지 연탄 배달에 나선 봉사자 수도 992명으로, 작년(1498명)보다 500명가량 적다고 한다. 허기복 연탄은행 대표는 “이번 성탄데이를 통해 연탄이 필요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알린다면 부족한 100만장도 금세 모일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날 백사마을 주민들도 성탄데이 행사를 맞아 연탄 배달에 나선 봉사자들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백사마을은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연탄으로 난방을 해결하는 주민은 130여 가구가 남아 있다. 30년 넘게 백사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문모(80)씨는 “한 겨울에는 하루에 연탄 6장은 때야 버틸 수 있고, 단지 겨울 뿐만 아니라 9월부터 4월까지는 때야 몸이 버틴다”며 “재개발한다고 이사시켜준다고는 하는데, 언제 갈 지를 모르니 일단 겨우내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내려가는 한파에도, 이날 봉사자들은 연탄을 가득 채운 지게를 이고 묵묵히 백사마을 골목을 누볐다. 특히, 성탄절을 맞아 가족 단위로 봉사를 하러 온 이들이 많았다. 봉사자들은 고사리손으로 연탄 1개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더욱 힘을 내는 모습이었다. 이날 11살, 5살 아이 둘과 함께 봉사를 하러 온 김태덕(42)씨는 “5살 아이에게는 연탄 1개도 버거운 무게지만, 아빠와 형이 열심히 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보람과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10살, 8살 딸들과 함께 10년 만에 연탄 봉사에 나섰다는 이모(40)씨는 “그간 이웃에게 온기를 전하는 일의 즐거움과 보람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아이들에게 당장은 힘들고 몸 곳곳이 쑤셔도, 마음은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매년 거르지 않고 봉사를 하러 왔던 이들도 어김없이 나섰다. 10년째 연탄 배달 봉사를 하고 있다는 성악가 최기수(46)씨는 백사마을 지리가 익숙한 듯 성큼성큼 골목을 돌았다. 그는 유럽에서 공부하던 중 연탄은행에 대해 알게 됐고, 귀국하고서는 봉사 현장에서 응원 공연을 여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는 연탄 배달 뿐만 아니라, 개인 독창회를 통해 관객 1인당 20장씩 연탄을 기부하고 있다고도 한다. 최씨는 “노래만 부르고 말 것이 아니라, 직접 연탄을 배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던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며 “연탄이 필요한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계속해서 기부를 하면서, 동시에 권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봉사자들의 구슬땀으로 오전 11시 50분쯤 연탄 배달이 마무리됐다. 33가구의 백사마을 주민들이 한 달 가량 쓸 수 있는 연탄들이 차곡차곡 채워진 것이다. 이날 혼자 봉사장을 찾아 묵묵히 연탄을 옮겼던 김우석(38)씨는 “봉사 신청을 할 때 10분만에 마감이 돼, 같이 오기로 한 친구는 못왔지만 혼자라도 와서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깨에 짊어진 무게만큼이나 사회가 따뜻해진 느낌이고, 앞으로 매년 봉사에 나올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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