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미술관 가야 예술적 감동 느낄까
‘명사 예술’보다 ‘형용사 예술’의 삶 고민해야
(시사저널=반이정 미술 평론가)
요즘처럼 마음이 들뜨는 연말이었다. 차가운 노변에 버려진 코끼리 인형이 눈에 들어와 카메라에 여러 장 담았다. 무심히 지나치는 행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가여워…"라며 버려진 코끼리 인형에 연민을 투사하는 이도 있었다. 이 경험담을 요약해 나의 신간 서문에 소개한 적이 있다. 예술 너머 평범한 사물 역시 그 용도와는 무관하게 보는 이에게 성찰의 단서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따라서 예술과 사물이 다르지 않다는 비평적 소신에서 시작한 연재물을 묶은 것이었다.
예술품 중 상당수가 인습을 따른 범작
한겨울 노변에 버려진 코끼리 인형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낀 때는 2008년 12월이다. 14년이 흐른 지금의 내 비평 소신이 당시와 똑같진 않다. 그렇지만 예술과 비예술을 대등하게 바라보게 만들었던 소신의 출발선만큼은 같다. 예술(가)로 분류되지만 범작의 수가 훨씬 많고, 남다른 예술성이 스민 비예술품이 예술계 바깥에 적지 않다는 인식이 그 출발선에 있다.
미술평론가인 내게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내 학위 논문 주제였을 만큼 상시적인 관심사다. 예술계에서 생산된 결과물을 일단 예술로 인정하는 '예술제도론'이라는 현대 영미 미학 이론이 있다. 예술과 비예술을 가치중립적으로 구분하는 설명법이다. 작품이 출중한지 후졌는지를 따지는 건 나중 문제고, 예술계에서 나온 물건을 예술로 봐주자는 깔끔한 정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안목이나 관점과는 무관하게 세간에서 예술로 쳐주는 공연장과 전시장을 찾아가 불만 없이 교양을 얻는다고 믿는 형편이다.
연말과 연초에 송년회와 신년회를 표방한 여러 모임을 소비자로 흡수하려고 분야별 예술 장르가 대형 공연과 전시회를 무대에 올린다. 일상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위안을 얻는 해방구가 예술이라는 점에 이견은 없으리라 본다. 일상의 평범함과 차별화를 하려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 기획물은 감정 과잉과 충만한 표현이 담긴 문구와 포스터를 판촉에 쓴다. 왜냐하면 예술적 표현이나 예술적 감동은 곧잘 충만한 감정 과잉 상태와 대등한 것인 양 여겨지는 정서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 노동, 교육, 의료 등이 자기 고유의 지분을 갖는 것처럼, 예술계도 다른 업종과 구분되는 예술계 고유의 세계관을 이미지화한 결과일 게다. 그렇지만 예술계가 내놓는 결과물 중 다수가 인습적인 공식을 따른 범작인 건 사실이다. 우리가 정작 감동과 영감, 성찰을 얻고자 한다면 '예술(품)'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예술적'이라는 형용사에 주목해야 한다.
예술계 바깥의 여러 전문 분야에서 비범한 감동을 주는 '예술적' 결과물이나 관련 인사들의 존재를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인류를 하나로 연결시킨 윈도 같은 컴퓨터 운영체계나 그 발명자 빌 게이츠의 존재는 정보통신 업계라는 분류 너머에서 '예술적'이다. 애플이 출시하는 기발한 성능의 상품이나 신제품 발표회 때 선보인 스티브 잡스의 키노트도 같은 사례다. 세계인이 모두 아는 이런 명품이나 명망가를 예로 들지 않아도, 비예술 업계에서 비할 데 없는 결과물 혹은 그것을 만든 이를 만날 때, 우리는 주저 없이 "완전 예술이네!"라고 탄성을 한다. 그처럼 '예술적' 감동은 요식업에서도 발견되고 정치판에서도 발견되며, 제도 교육 현장,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일상의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 몸에 밴 버릇처럼 송년이나 신년 혹은 기념일에 공연장과 전시장에서 예술 체험을 얻으려는 흐름이 예술과 현실의 분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TV나 라디오의 교양 프로그램에 섭외돼 현대미술에 관해 해설해 주는 초대손님으로 고정 출연한 적이 적지 않다. 이처럼 출연이 고정되면 그 프로그램의 지속 기간이 서너 달 이상은 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딱 한 번 S라디오 방송에 미술 패널로 고정 출연 섭외를 받고, 단 2회 만에 짤린 적이 있다. 2011년의 일이다. 그해 3월 일본 도호쿠 지방에 태평양 해양 지진이 일어났는데, 일본 근대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였고 후일 '동일본대지진'으로 명명된 초대형 자연재난이었다.
동일본대지진 보도사진과 목판화 작품의 차이
당시 세계 언론에 유포된 사진 가운데, 방파제를 넘어 밀어닥친 거대한 쓰나미가 육지의 차량들을 덮치는 보도사진이 유명했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나는 그 보도사진을 에도시대 일본 목판화가 호쿠사이의 《파도》라는 우키요에 목판화 작품과 대등하게 비교하는 해설을 했다. 당대 일본인이 자연재해에서 겪은 실화를 기록한 진경산수인 점, 호쿠사이의 목판화를 오늘날 미술관에서 사각형 프레임 액자로 본다면, 지금 동시대인은 자연재해의 괴력이 진경으로 기록된 사진을 집에서 모니터라는 사각형 프레임으로 본다는 점에서 같고, 둘 다 '스펙터클'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동일본대지진의 재해 현장을 담은 기록사진을 누구도 '감상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사진의 스펙터클이 주는 긴박감과 경탄을 드러내지 않을 뿐, 전 세계에서 그 보도사진을 반복해서 찾아본 인구의 수만 놓고 보면, 일본 미술사의 대표작 호쿠사이의 우키요에 목판화 작품을 능가하고도 남을 거라고 라디오 방송에서 말했다. 미술관에 걸린 호쿠사이 목판화는 예술품이고, 동일본대지진의 재해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언론보도의 영역이다. 그렇지만 그 둘이 담는 내용과 형식 그리고 관람 방식은 다르지 않다는 게 내가 전하려던 메시지였다. 아무튼 그 방송이 나간 후 다음 회부터 나는 출연하지 못했다. 방송 관계자나 청취자가 마음에 품고 있을 위로나 감동, 아름다움과 연결된 예술관과 전업 미술평론가의 그것이 너무 달랐을 것이다.
미술을 전공하지 못했으나 미술가를 꿈꾸는 이들이 내게 자문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개 범작 수준인 그들은 만인을 감동시키는 예술가이길 꿈꾼다. 반면 미대 재학생 가운데 자기 전공에 흥미를 잃어, 딴생각뿐인 미대생이 퍽 많다. 미대 졸업자 중 미술가로 남는 수가 극히 적은 게 증거다. 전공에 흥미를 잃은 미대생이건, 미술가를 꿈꾸는 비전공자건, 예술로 삶이 풍요로워지길 바라는 소비자건 '예술품'을 인습적으로 제작하거나 감동하기로 작정하면 진짜를 얻지 못한다. '예술적' 입장과 삶이 무언지를 자문하는 게 진짜 예술을 만나는 출발선이라고 나는 믿는 쪽이다.
반복해서 들려주는 조언도 있다. 진짜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라면 예술을 둘러싼 인습에 휘둘리지 않고 많은 공부를 먼저 한다. 그런 이의 수는 극히 적지만 그게 진짜다. 예술은 본래 소수에 속한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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