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공룡 잇달아 무릎 꿇린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저력
태광산업·BYC·KT&G·에스엠 등 대상 주주행동 성과
하락장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사 될지 주목
(시사저널=이승용 시사저널e. 기자)
경기 침체 우려가 가시화되면서 국내 증시가 좀처럼 맥을 못 추고 있다. 코스피지수는 연초 대비 20% 넘게 빠진 상태다. 2023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지속,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 코스피지수 저점이 2000선을 뚫고 1900선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마저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국내 행동주의펀드의 행보가 최근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펀드가 주주 가치 제고를 목표로 활발히 활동하면서 침체에 빠진 국내 증시를 이끄는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행동주의펀드는 기업의 주주로 참여한 뒤, 지배구조나 경영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 주가를 끌어올리는 펀드다. 국내 증시에는 2000년대부터 외국계 헤지펀드를 중심으로 행동주의펀드가 맹활약했으나 최근에는 토종 행동주의펀드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국내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주 가치 제고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점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해결사로 바라보는 시선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트러스톤·얼라인파트너스 등 맹활약
실제로 트러스톤자산운용·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안다자산운용 등 행동주의를 표방한 펀드운용사들이 최근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 가치 제고'를 내걸고 기업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이 대표적이다. 이 펀드는 최근 흥국생명에 대한 태광산업의 4000억원 유상증자 지원을 무산시키면서 주주 가치를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흥국생명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분 56.3%를 가지고 있지만 태광산업은 흥국생명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태광산업이 흥국생명 유상증자에 참여하면 상법 제542조의9 제1항에 따라 금지되는 신용공여행위라고 지적하며 법적 소송에 나설 계획이라고 엄포를 놨다. 결국 여론의 압박에 밀린 태광산업은 지난 12월14일 공시를 통해 흥국생명의 전환우선주 인수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태광산업의 유상증자 참여를 무산시키면서 자신감을 얻은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지난 12월15일 태광산업 주식 보유 목적을 경영참여로 변경했다. 향후 적극적인 주주활동에 나서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의 이런 행동은 2021년 6월 태광산업 지분 5.01%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하면서부터 어느 정도 예고됐다. 태광산업은 1조2000억원이 넘는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가지고 있지만 배당 등 주주 가치 제고 활동에는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기업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태광산업만이 타깃은 아니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최근 BYC를 상대로도 '무력시위'를 펼치고 있다. BYC는 속옷 회사로 유명하지만 사실 2조원에 달하는 부동산을 보유한 알짜 회사로 늘 보유자산 대비 저평가됐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보유 부동산을 공모 리츠화해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는 주주제안을 지난 12월20일 경영진에게 전달한 상태다.
KT&G 역시 행동주의펀드들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와 안다자산운용은 1%가량의 지분율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KT&G의 100%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를 인적분할 후 상장해야 한다는 주주제안을 내놓으며 적극적인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당장 투자자들이 반응했다. 행동주의펀드들이 주주제안 후 여론전에 나서면서 7만~8만원을 유지하던 KT&G 주가는 단숨에 9만원을 넘어 10만원 전후까지 오른 상태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도 연예기획사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을 상대로 성과를 이뤄냈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최근 에스엠 지분 1%가량을 매수한 다음 에스엠이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개인회사인 라이크기획과 불공정한 용역계약을 맺고 있다고 문제 삼았다. 지난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공개서한 발송 후 결국 에스엠은 지난 10월 라이크기획과의 프로듀싱 계약 조기종료를 공시했다.
자신감을 얻은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2023년 1월13일까지 추가적인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주주서한을 에스엠에 전달했다. 전문가들은 주주 행동주의펀드의 이런 적극적인 행보가 회사 주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 이화정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에스엠의 최대 저평가 요인이었던 라이크기획 관련 이슈가 행동주의펀드의 요구로 해소된 상태다"면서 "주주서한 요구에 따라 지배구조 투명성이 추가로 개선된다면 작은 우려 요인까지 모두 온전히 해소될 수 있어 주가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장하성펀드 실패를 강성부펀드가 되살려
사실 해외에서는 의결권 자문기구인 ISS가 1985년 만들어졌을 정도로 주주 행동주의가 보편화돼 있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고려대 교수 출신인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맡던 1997년 제일은행이 부도난 한보그룹에 대규모 불법 대출을 해줬다는 점을 문제 삼았고, 소액주주들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아 주주총회에 참석했다. 이를 국내 주주 행동주의의 시초로 본다.
펀드가 행동주의를 내세운 것은 2000년대 들어 외국계 헤지펀드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2003년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이 SK그룹의 지주사 격인 SK의 지분 14.99%를 매수해 경영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선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이후 국내 증시에서 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공습이 본격화됐다. 칼아이칸은 2006년 KT&G 지분을 인수하며 경영권을 위협했고, 영국계 헤르메스 역시 삼성물산 지분 5%를 획득한 후 지배구조와 주주 가치 제고를 주장했다. 일부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외국계 헤지펀드들은 주가가 오르자 모두 보유 지분을 매각해 수천억원을 챙기고 국내 증시를 떠나 '먹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성공을 본 장하성 당시 고려대 교수는 미국계 라자드자산운용이 내놓은 한국지배구조펀드, 이른바 장하성펀드의 투자고문을 맡았다. 장하성펀드는 초반 강한 돌풍을 일으켰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 손실이 이어지자 결국 2012년 청산됐다. 이후 국내에서 행동주의펀드도 자취를 감췄다. 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로는 엘리엇매니지먼트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토종 행동주의펀드들이 존재감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았다.
2018년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 의무)가 도입되면서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기관투자가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이행 사항들을 권고한 모범 규준이다. 국내 증시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이 2018년 7월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선언하면서 행동주의펀드 활성화를 위한 요건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특히 강성부펀드(KCGI)의 성공은 국내 행동주의펀드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강성부펀드는 2018년 11월부터 경영권 참여를 내걸고 한진칼 지분을 인수하며 한진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한진칼 주가를 끌어올렸다. 이후 지난 3월 호반건설에 보유지분을 대부분 매각하면서 3000억원대 투자수익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강성부펀드의 성공으로 국내 증시에서도 토종 행동주의펀드가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겼고 후발 주자들이 잇따라 보폭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제2의 강성부펀드는 "나야 나!"
다만 강성부펀드를 제외한 후발 국내 행동주의펀드들은 대부분 외국계 헤지펀드들과 달리 경영권을 위협할 수 없는 소수 지분만을 보유하고 있다. 대신 적극적인 주주제안을 통해 기업들과 가급적 협조하는 방향으로 주주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는 자본력의 문제도 있지만 합리적인 주주제안을 통해 기관투자가들의 협조만 얻을 수 있다면 소수 지분으로도 파괴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국내외 증시에서 각종 사례로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장하성펀드의 실패 원인 역시 구체적인 목표가 불명확했기에 활동 과정에서 기관투자가들의 협조를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현재 지배적이다. 국내 증시에서 지배구조 개선 등 증시 선진화에 대한 니즈(욕구)가 꾸준해 향후에도 이 같은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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