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쿠르드인 이틀 연속 격렬 시위…“이것이 왜 테러가 아닌가”

박은하 기자 2022. 12. 2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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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트라우마 되살아난 프랑스 쿠르드인
24일 항의 시위로 11명 체포, 차량 4대 전복
숨진 쿠르드인 중 한 명은 IS와 싸운 여성
쿠르드인 시위대가 총격 사건 발생 다음날인 24일(현지시간) 파리 레퓌블리크(공화국)광장에 쿠르드 깃발과 희생자들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쿠르드인 3명을 숨지게 한 총격 사건에 분노한 쿠르드인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이틀 연속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 당국은 이번 공격을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가진 ‘외로운 늑대’형 인물이 벌인 범행으로 보고 있다. 반면 쿠르드인 공동체는 쿠르드인을 겨냥한 테러로 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① 총격 후 쿠르드인들은 어떻게 대응했나
쿠르드인들이 24일(현지시간) 쿠르드문화센터 안에 마련된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박은하 기자

아흐메트-카야 쿠르드문화센터와 쿠르드 식당이 마주보고 있는 파리10구 앙기앙 거리는 24일(현지시간) 아침부터 골목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파로 가득 찼다. 전날 쿠르드인 3명이 숨지고 3명이 중태에 빠진 총격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쿠르드문화센터 입구와 양 옆에 총격 사건으로 숨진 에미네 카라, 압둘라흐만 키질, 미르 페르웨르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센터 안에 분향소가 마련됐다. 사람들은 사진 앞에 꽃을 놓거나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며 추모한 뒤에도 발을 떼지 못했다. 프랑스쿠르드민주평의회(CDKF)의 본부로 사용되는 센터 안에는 대부분 여성 노인들이 있었고, 젊은이들과 남성들은 바깥에 있었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놓여진 센터 옆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라흐라(19)는 “비통하다”며 “우리의 분노와 함께 쿠르드인은 평화를 원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쿠르드인들이 24일(현지시간) 전날 총격 사건이 벌어졌던 아흐메트-카야 쿠르드문화센터와 쿠르드 식당이 마주보고 있는 파리10구 앙기앙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박은하 기자

골목에서 1.2km 떨어진 파리 중심가 레퓌블리크 광장에도 많은 인파가 모였다. 광장 한가운데 ‘마리안느의 동상’ 아래 인파들 사이로 쿠르드족 독립운동단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 깃발과 파시스트 반대 구호를 적은 피켓이 보였다. 2013년 1월 파리에서 살해된 PKK 활동가들의 영정 사진을 든 사람들도 있었다.

전날 총격 직후 벌어진 시위를 경찰이 최루탄을 쏴서 강제 해산시키자 CDKF는 전통적 시위 장소인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시위를 재개했다.

정오 무렵 행진이 시작됐다. 오후 1시쯤 광장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탕플대로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 무력충돌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대는 둘로 갈라졌다.

성난 시위대는 차량을 넘어뜨리고 경찰을 향해 벽돌을 던졌다. 쓰레기통 등 곳곳에 불이 붙었다. 경찰이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차량 네 대가 전복되고 최소 한 대가 불에 탔다. 충돌은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오후 3시쯤 광장으로 연결된 파리 지하철 3호선 레퓌블리크역 안에서도 최루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24일(현지시간) 파리 레푸블뤼크(공화국) 광장 인근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벌어지며 소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EPA연합뉴스

충돌에 휘말리지 않고 바스티유광장에 도착한 시위대 수백명은 이번 총격 사건 희생자와 “자유를 위해 죽은 모든 쿠르드인”을 기리는 1분간의 묵념을 했다.

로랑 누네즈 파리 경찰청장은 이날 시위 참가자 11명을 체포해 조사 중이며 경찰관 31명이 다쳤다고 BFM-TV에 밝혔다. 누네즈 청장은 정상적으로 시작된 시위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했다면서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② 총격을 벌인 사람은 누구인가

파리 검찰청에 따르면 전날 총격 사건 용의자는 철도 기관사로 일하다 은퇴한 프랑스 국적의 69세 남성이다. ‘윌리암.M’으로 알려진 용의자는 불법 무기 소지 및 무기를 사용한 폭력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으며 최근 구금 중 석방됐다. 지난해 12월 펜싱용 칼을 들고 파리12구의 이민자 수용소에서 남성 2명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도 받고 있다.

프랑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날 용의자는 쿠르드문화센터 출입구 계단을 걸어나오는 사람들에게 총을 쏴서 3명을 숨지게 했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따라 맞은편 식당에 들어가 총을 쐈다. 용의자는 도망치는 사람을 쫓아 미용실까지 들어갔다가 사람들에게 제압당했다. 그는 경찰에게 연행될 때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밝혔다. 쿠르드문화센터 주변에는 쿠르드인 상점 이외에 멕시코 요리, 태국 요리, 중국 요리 등을 파는 다양한 이주민들의 가게가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쿠르드인들이 파리 중심부에서 ‘끔찍한 공격’의 표적이 됐다”고 말했다. 좌파 정당 연합체 뉘페스를 이끄는 장 뤽 멜랑숑 의원과 안느 이달고 파리시장 등 좌파 정치인들은 ‘극우’를 비난했다. 파리10구청사는 청사 건물의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대신 쿠르드 깃발을 걸었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은 “용의자는 명백히 외국인을 표적으로 삼았다”면서도 “극우 세력이나 테러 단체와의 연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르마냉 장관은 용의자가 외국인을 공격할 의도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쿠르드인을 목표로 삼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사건 수사도 국립대테러검찰청(PNAT)이 아닌 파리 검찰이 진행한다. 로르 베쿠오 파리 검찰은 총격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인종차별적 동기는 반드시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③ 쿠르드인은 왜 사건을 테러라고 규정하나
24일(현지시간) 파리 10구청 청사에 유럽연합기와 함께 쿠르드기가 걸려 있다. 프랑스 국기는 돌돌 말아 끈으로 묶어 놨다. /박은하 기자

쿠르드인들은 이번 사건을 튀르키예가 배후에 있는 ‘테러’가 아닌 인종차별주의 성향의 개인이 저지른 ‘단독 범죄’로 규정한 프랑스 당국의 판단에 분노하고 있다. 아지트 폴라 CDKF 대변인은 전날 밤 늦게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는 사건이 테러로 규정되지 않은 이 상황에 분노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 공격은 테러이고 정치적인 공격이며, 튀르키예가 고의적으로 유지하는 긴장의 일부”라고 말했다.

튀르키예는 유럽연합(EU)과 미국이 테러단체로 지정한 쿠르드노동자당(PKK) 등 쿠르드족 단체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치고 있다. 튀르키예는 2019년부터 시리아 접경지대 쿠르드족 민병대를 소탕하겠다며 공습을 시작했고 지난 11월에는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상군 투입을 예고했다.


☞ 튀르키예, 시리아 쿠르드민병대 소탕작전에 지상군 투입 예고…“미·러도 못말려”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11241751011

총격 사건이 일어난 날 쿠르드문화센터에서는 PKK 창립자인 사키네 칸시즈, 피단 도간, 레일라 소일레메즈 등 여성 활동가 3명의 사망 10주기 행사를 논의하는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2013년 1월9일 파리에서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당시 프랑스 사법 당국은 튀르키예 스파이가 사건에 연루됐다고 판단했으나 튀르키예 국적 용의자가 재판에 회부되기 전 사망하면서 사건의 진상규명은 흐지부지됐다.

또 다른 CDKF 대변인 베리반 피라트는 BFM TV에 “쿠르드인 공동체는 2013년 사건으로 이미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 이번 사건으로 공포에 떨고 있다”면서 “쿠르드인, 쿠르드인 활동가, 쿠르드 투사가 위협받고 있다. 프랑스가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브라힘 칼린 튀르키예 대통령실 대변인은 25일 트위터에 이번 쿠르드인 시위로 불타고 전복된 차량 사진을 올린 뒤 “이들이 바로 시리아의 테러리스트 조직과 동일한 프랑스의 PKK”라고 비난했다.

쿠르드인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후 쿠르드 민족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실패한 뒤 쿠르드인이 거주하는 국가의 ‘경계 대상’이 됐다.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에 주로 거주한다.


☞ [구정은의 '수상한 GPS']우리가 몰랐던 ‘쿠르드족’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1910180740001

④ 총격으로 희생된 사람은 누구인가
23일(현지시간) 총격 사건으로 숨진 쿠르드인 3명의 사진과 조문객들이 남기고 간 꽃과 초가 쿠르드문화센터 건물 주변에 놓여 있다. 왼쪽부터 미르 페르웨르, 에미네 카라, 압둘라흐만 키질. 촬영은 2022년 12월 24일/ 박은하 기자

이번 총격 희생자 에미네 카라는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IS)와의 전투에 참여했던 쿠르드 여성운동 지도자이다. 시리아의 쿠르드인은 쿠르드 독립에 우호적인 국제여론 조성을 위해 IS를 상대하는 전투에 대거 가담했다. 그러나 IS 격퇴 후 ‘쿠르드 문제’는 방치됐다. 카라는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난민 자격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희생자인 미르 페르웨르는 가수 겸 작사·작곡가이자 튀르키예 출신 정치적 난민이다. 베리반 피라트 CDKF 대변인은 그는 “쿠르드어로 글을 쓰고 노래해 에르도안 체제를 교란시켰다”며 체포와 투옥 위기를 피해 프랑스로 왔다고 전했다. 그는 쿠르드문화센터 맞은 편 식당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희생자 중 가장 연장자인 압둘라흐만 키질은 쿠르드 공동체에서 ‘어르신’으로 통했다. 쿠르드문화센터를 자주 방문하고 하루 종일 머무르며 공동체 내 각종 일에 열성적으로 임했다고 CDKF는 전했다.

박은하 경향신문 순회특파원이 22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로 인한 에너지 위기,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 여파에 직면한 유럽의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파리 | 박은하 특파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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