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드는 곳…” 서울역, 여성 홈리스들이 그린 ‘집’
서울 최저온도가 영하 11도까지 내려간 22일, 길 곳곳에는 전날 온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귀를 에는 한파 속 서울 광장에서는 2022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 주최로 여성 홈리스 전시회 ‘여성 홈리스가 나눈 집 이야기’가 열렸다.
여성 홈리스들은 자신이 살아온 공간을 ‘심리지도’로 표현했다. 누군가는 서울역을 그렸고, 누군가는 곰팡이가 핀 숙소를 그렸다. 시설도 편치 않았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집’을 꿈꿨다. 햇볕이 들고 병원이 가깝고 토끼를 키울 수 있는 곳.
홍수경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현재 홈리스 지원 제도에는 젠더 특성이 반영돼 있지 않다. 대부분 남성 홈리스 중심이다. 여성 홈리스의 생존은 각자의 몫”이라고 했다. 그는 “여성 홈리스는 각종 범죄를 피해 눈에 띄는 곳에 머물지 않는다. 시장, 목욕탕, 화장실 등을 청소하고 임시적인 잠자리를 확보하거나 돌봄노동을 제공하고 기도원에서 지낸다”고 했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서울역 역사 근처와 지하철역 근처에서 노숙하는 여성 홈리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홍수경 활동가는 “거리나 시설, 쪽방뿐 아니라 여성 홈리스들이 거처로 삼는,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청소하고 얻는 임시적 잠자리) 등을 포함해 실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거리·하수구 물이 역류하는 집, 곰팡이가 핀 쪽방에 살아요”
로즈마리(가명‧66)는 서울역에서 거리 생활을 시작했을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그가 살던 무허가 건물이 헐리면서 홈리스가 됐다. 홈리스 지원 기관에서는 ‘얼어 죽지 말라고’ 방을 지원해줬다. 열댓명이 함께 지내는 곳이었는데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방에 들락날락해 그곳에서도 잠자기가 편치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공간을 서울역 구역사, 신역사로 그려냈다. “서울역에선 비둘기를 뺄 수가 없어요.” 그는 비둘기를 끔찍이 여기는 홈리스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비둘기에게 빵 부스러기라도 주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홈리스는 외로운 사람들이니까, 자기들끼리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따로 놀아요. 그러니 특히 비둘기를 예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음식을 주기도 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요.”
역사 처마 앞에 펼쳐진 우산들도 기억에 남는다며 그림 한쪽에 그렸다. 그는 “빨간 우산, 노란 우산, 파란 우산이 예뻤다”고 했다. 색색깔 우산 안에는 여성 홈리스가 있었다. 여성 홈리스들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운 탓에 갖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지수(가명‧31)는 서울을 ‘곰팡이’로 표현했다. 서울에는 수많은 집이 있지만, 성인이 돼 집을 나온 지수가 살 수 있는 집에는 늘 곰팡이가 있었다. 처음 구한 집을 이부자리 두 개로 묘사했다. 생면부지의 누군가와 같이 사는 곳이었다. 이불을 펴면 문을 열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살았던 집은 그림 오른쪽에 동그라미 스티커로 나타냈다. 지수는 파란색 동그라미 가운데 분홍색 동그라미로 표시한 곳에 살았다. 근처인 빨간색 동그라미 집에서 성범죄가 일어났다고 했다. “그 집보다 제가 사는 집이 더 취약했어요. 창문이 나무여서 이중 잠금장치를 할 수 없었어요. 집주인은 시시티브이도 달 수 없다고 했어요. 들어오면 끝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사고 이후 해 뜰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으로 살았던 집은 그림 가운데 파란색 사각형이다. 집 전체에 곰팡이가 가득했다. 지수는 “락스칠을 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곰팡이를 피해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불법 건축물이라 벽을 통해 바람이 들이쳐 추웠다.
사계절(가명‧46)은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10대 때부터 홈리스 생활을 시작했다. 거리와 쪽방, 반지하를 전전했다. 그러다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뇌전증에 대한 진단도 받고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임대주택에 산다. 하지만 불안한 거처는 그를 다시 거리로 내몬다.
“비가 오면 하수구 물이 역류해 집으로 들어와요. 마음이 답답하죠.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 거리로 향하게 돼요.” 사계절은 서울역 홈리스 지원센터를 매일 나가게 된다고 했다. 홈리스행동은 홈리스를 “주거를 통해 생겨나는 사회적 관계와 권리 등이 박탈된 상태”로 정의한다.
경상도에 살던 이사렛(가명‧17)은 지난해 9월 가족과 떨어져 홀로 서울에 왔다. 그는 자신이 살던 경상도를 그림 왼편에 배치했다. 그곳에 있는 집과 학교는 이사렛에게는 힘든 공간이었다. 그는 회색 물감을 잔뜩 칠하는 것으로 심정을 표현했다. “서울에 와서 고시원에서 한두 달을 버텼어요. 하지만 사람 살 곳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사렛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그림 오른쪽에 그렸다고 했다. 이 그림에는 사람이 여럿이다. 집과 창고, 휴식 공간이 있다. “사람들이랑 같이 뛰어놀고 같이 모여서 얘기하기도 하고 식사하기도 하고 그런 공간을 갖고 싶어요.”
■ 햇볕 들고 병원 가까운… 토끼·자식과 함께하는 ‘나만의 집’
동물을 좋아하는 난초(가명‧47)는 “토끼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그리면서 강아지와 고양이에게도 각각 집을 만들어줬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15살 때부터 집을 나와 홈리스 생활을 시작한 난초는 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다.
강아지와 고양이 옆으로는 마당을 그렸다. 마당 뒤에는 종합병원이 있다. 난초는 말했다. “마당을 뒤로해서 병원이 가까우면 좋겠어요.” 홈리스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들다.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보면 전국 290여 개 의료시설 가운데 보건소를 제외하면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은 60여 곳뿐이다. 대부분 공공병원인데 코로나19 당시에는 이 병원들을 갈 수 없게 되면서 이들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홍수경 활동가는 “서울 용산구에 지내는 서울역 홈리스가 10km 떨어진 동작구 보라매 병원까지 걸어가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했다.
고시원에 사는 난초는 곧 쪽방으로 옮길 예정이다. “너무 춥기 때문”이다. 그는 지원주택(질환이 있는 홈리스가 주거지원과 일상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에 가려고 했지만 경쟁률이 너무 세서 포기했다고 했다.
“친구 집 가니까 장미꽃 덩굴이 있더라고요. 좋았어요.”
로즈마리는 그림 가운데 붉은 장미꽃을 그렸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문’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희망 사항’이라며 ‘욕조’와 ‘마당’도 언급했다. 그는 올해 초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운이 좋게 욕조가 있는 방을 지원받아 격리됐다고 한다. “아주 좋더라고요. 일주일 동안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들어갔다 나왔다 했지요.” 그는 욕조 안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상상하며 욕조 안에는 거북이를 그렸다.
“화장실이 안 막히는 집이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숨 쉬고 살 집, 그런 집이 있으면 진짜 고마울 것 같아요.”
사계절이 그린 그림에는 식탁에 세 식구가 모여있고 큰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그는 “반지하에 살 때 위층 남자가 자꾸만 애들과 나를 위협하고 욕했다. 양육권을 정리해 애들을 시가로 보냈다”고 했다. 그는 “공공 임대주택을 신청해놨다. 그곳에 가면 50년은 살 수 있다고 한다. 임대주택에 당첨돼서 즐거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데려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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