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꿈꾸는 ‘위대한 업적’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하고만 살고 싶다” “우륵에게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등의 어록을 남긴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린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후 첫 앨범을 발매한 그는 한층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
11월 28일 앨범 출시 당일 임윤찬과 홍석원 광주시향 상임지휘자는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주로 공연을 통해 관객을 만나왔던 임윤찬에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이 멋쩍은 듯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무대 위로 올라온 임윤찬은 이번 앨범에 수록된 앙코르곡인 몸포우의 '정원의 소녀들’을 연주했다. 2분 58초의 짧은 시간 동안 뭉근하고 따사로운 피아노 소리가 부산했던 기자회견장을 잠재웠다.
이번 앨범은 지난해 임윤찬이 광주시향과 협연한 송년음악회에서 시작됐다. 임윤찬의 연주에 감명받은 홍석원 지휘자는 이미 계획하고 있던 앨범 작업에 참여해달라고 제안했고, 임윤찬은 흔쾌히 응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 바버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메인 곡으로 실렸다.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정원의 소녀들’, 스크리아빈의 '2개의 시곡’ 1번과 '음악수첩’도 만나볼 수 있다. 베토벤의 '황제’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임윤찬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야기를 꺼냈다.
임윤찬의 '황제’
‘황제’는 베토벤이 1809년 작곡한 곡이다. 장대한 스케일과 위풍당당한 소리로 유명하지만 임윤찬은 이를 연주하며 죽음을 떠올렸다. 그는 "베토벤 협주곡 5번을 연주할 때,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쓴 유서를 떠올린다"며 "죽으려는 사람답지 않게 글에서 힘이 느껴지는데, 베토벤은 단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20대 후반부터 청력 상실로 고통을 겪은 베토벤은 1802년 의사의 권유로 빈을 떠나 자연으로 둘러싸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휴양한다. 그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유서를 쓴다. 홍석원 지휘자도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며 슬픔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송년음악회에서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주할 때는 10대 청년의 질풍노도와 힘을 느꼈어요. '황제’도 에너제틱할 거라 생각했는데 2악장이 눈물 날 정도로 애절했어요. 다양한 색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방향이 설득력이 있어서 천재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임윤찬의 새로운 모습이 담긴 '황제’ 세 악장이 끝나면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가 흘러나온다. 윤이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이 곡을 썼다. 봉기와 학살을 다룬 1부, 비탄을 담은 2부, 민주주의 투쟁을 지지하는 3부가 총 20분 길이로 이어지는 곡이다.
이번 앨범은 광주시향에게도 의미가 깊다. 광주시향이 '광주여 영원히’를 연주해 공식 음원으로 낸 것은 곡이 발표된 1981년 이후 처음이다. 홍석원은 "은퇴를 앞둔 단원들 중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분도 있다"며 "광주시향보다 이 곡을 더 잘 연주할 수 있는 교향악단은 전 세계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윤찬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렇게 엄청난 스피릿으로 연주를 한 걸 본 적이 없다"며 "라흐마니노프에게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있었던 것처럼 제 마음에 광주시향이 깊이 자리 잡았다"고 부연했다.
"피아니스트가 해야 할 일은…"
임윤찬은 60년 역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최연소 우승 이후 세계적인 클래식 스타가 됐다. '뉴욕타임스’는 콩쿠르 준결선에서 선보인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연주를 올해 10대 클래식 공연으로 뽑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우승으로 인한 관심은 3개월뿐"이라며 "대단한 업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해 화제를 모았다.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대단한 업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임윤찬은 "운 좋게 콩쿠르에서 1등 하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며 "베토벤 소나타, 모차르트 소나타나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는 것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 "음악회를 보기 힘든 분들을 위해 연주하는 게 음악가의 역할"이라며 "호스피스 병동이나 보육원에 가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19세의 소년, 임윤찬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71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의 말미, 길 위를 떠도는 주인공 가족은 이곳저곳에서 퇴짜를 맞는다. 급기야 음악 소리에 홀려 들어간 성당에서도 쫓겨난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가족 위로 오르간 소리가 들린다. "음악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가족을 음악만이 감싼다. 임윤찬은 자신의 말을 이렇게 부연했다.
"저는 수학이나 과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위대한 수학자나 과학자의 강연들을 통해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부족하고 미숙한 사람의 연주로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적은 분들에게 새로운 우주를 열어드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해요. 연주를 통해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건 돈 이상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임윤찬은 2022년 12월 한국·일본에서의 공연을 마친 뒤, 1월 18일 영국 런던 위그모어 홀 무대를 시작으로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등 전 세계를 돌며 바쁜 공연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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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밴클라이번콩쿠르 유니버설뮤직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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