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 뒤에 또다른 폭탄 숨어 있었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 이때쯤 언론사들은 10대 뉴스를 발표합니다. 올해 경제 부문 10대 뉴스에는 사상 최대 무역적자, 고물가, 고금리, 가계부채, 집값 하락, 레고랜드 발 기업 자금경색 등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겠죠.
미국발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았던 때로 돌아가 볼까요? 2008년 12월 26일, 한 국내 신문사 선정 10대 뉴스 1위는 <또 다시 구조조정>이었습니다. 바로 기업의 구조조정을 말합니다.
<10대 뉴스 중 1위>
● 주가 폭락·환율 급등… 구조조정 확산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내 경기도 직격탄을 맞았다. 원·달러 환율이 한때 달러당 1,500원을 돌파했고 주가·펀드는 반 토막 났으며 부동산 거래는 실종됐다.
손실을 비관한 투자자와 증권사 직원의 자살 소식이 잇따르고 극심한 돈 가뭄 속에 부도 기업이 속출했다.
급기야 4분기(10~12월) 마이너스(-) 성장이 확실시돼 ‘외환위기보다 더한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 서울신문 선정 2008년 10대 뉴스 中
굳이 2008년 당시 기사를 찾아본 건 환율 급등락과 집값 하락, 주가 하락, 기업 자금난, 경기침체 우려 등 당시 상황과 비슷한 게 많기 때문입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쓰러졌지만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이른바 한계기업들이 극심한 자금난 속에 무너졌습니다. 한계기업이란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을 이자 비용으로 나눈 비율)이 3년 연속 1 미만인 기업으로, 영업으로 벌어들인 이익으로 대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상태가 3년 계속된 기업을 말합니다. 속칭 좀비기업으로도 불리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 기업은 간신히 버티기만 하는 좀비기업이 맞긴 하지만, 이 중에는 몇 년간 이자도 갚지 못하다가 3년 뒤에 탈출구를 찾아서 벌떡 일어서는 기업들도 있기 때문이죠.
■ 아픈 손가락 한계기업…기업 10곳 중 2곳은 이자도 감당 못 해
한계기업은 그래서 한국 경제에서 아픈 손가락입니다. 국민 일자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실직 이후 다른 일자리로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위기 시 정부 차원에서 한계기업을 연명시켜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금융위기 타격이 지속 되고 있던 2009년 1월,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범금융기관 신년 인사회에서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ㆍ기업 부문의 잠재부실을 털어내고 기초체력을 보강해야 한다"며 "기업들의 옥석을 가려 생존 가능한 기업에는 충분히 유동성을 지원하고 한계기업은 조속한 퇴출을 유도해야 한다"며 좀비기업을 퇴출시킬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한계기업에 대한 정리가 있었을까요?
조사기관과 조사 기준에 따라 한계기업 숫자와 비중에 차이가 있는데, 한국은행 자료(2014년 4월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외부감사 대상 기업에서 한계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금융위기 발생 당시 9.0%에서 다음 해인 2009년말 10.2%(2,019개), 3년이 지난 2012년 말엔 15.0%(2,965개)로 증가했습니다. 위기 이후에 한계기업이 계속 늘어난 겁니다.
한국은행이 지난 9월과 이달 22일 발표한 금융안정상황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말 기준 전체 외부감사 대상 기업 가운데 한계기업 비중은 14.9%나 됩니다. 금융위기 때보다 더 늘었고, 유럽 재정위기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10년 전 2012년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행은 올해 한계기업 비중이 18.6%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10개 기업 중 2개 기업은 최근 3년간 이자도 감당 못 하는 기업이란 얘깁니다. 특히 부동산업 한계기업 비중은 28%로 치솟았고, 건설업 분야 한계기업도 부동산 PF대출 위험으로 경계 대상이란 게 한국은행의 판단입니다.
산업은행 KDB 미래전략연구소가 지난 7월 발간한 '한계기업 현황과 시사점'이란 보고서를 보면 한계기업 증가 폭이 더 높습니다. 이에 따르면 2011년 10.2%였던 한계기업 비중이 지난해 18.3%까지 급등합니다. 한국은행 자료보다 한계기업 비중이 더 높고 증가 추이도 더 가파르죠. 특히 제조업과 부동산, 임대업, 도소매업에서 한계기업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올해는 금리가 가파르게 올랐고 기업 경기도 좋지 않기 때문에 대출을 감당하기 힘든 기업들이 늘어 한계기업 비중은 훨씬 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기업부채 증가율 1위 한국
한계기업의 문제는 기업의 성장성도 떨어진 데다 대출액도 많다는 겁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대출이자를 갚는데 돈도 제대로 못 벌고 은행에서 빌린 돈도 많으면 결국 대출 이자만 갚다가 좀비기업이 되는 거죠. 정부가 이런 한계기업을 살리려다 자칫 세금만 축내고 산업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미국처럼 빠른 속도로 올리지 못한 건 가계부채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기업부채도 주요 요인입니다. BIS 국제결제은행이 세계 43개 주요국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가계부채뿐 아니라 기업부채 역시 위험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통상 부채를 볼 때는 그 나라 경제 수준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지를 보면 되는데, 우리나라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지난 2분기 105.6%로 전체 조사 대상국 가운데 스위스, 호주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문제는 가계부채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금융기관을 제외한 GDP 대비 기업부채 비율은 올 2분기 기준 116.5%로 부채비율도 높지만, 증가 속도로 봤을 때 위험합니다. 지난해 4분기와 비교했을 때 증가율은 2.46%로 전체 조사 대상국 중 5위를 기록했고, GDP 대비 기업부채 비율이 92.5% 였던 2017년과 비교했을 때는 전체 조사 대상국 가운데 증가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IIF 국제금융협회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 '세계 부채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분기 기준 102.2%로 조사대상 35개 나라 가운데 1위를 차지했습니다. GDP 대비 비금융기업 부채 비율도 2분기 117.9%로 홍콩, 싱가포르, 중국에 이어 4위를 기록했습니다. 전 분기 대비 증가 폭은 6.2%로 주요국 중 2위를 기록했습니다.
국제결제은행과 국제금융협회 모두 우리나라는 가계부채 위험만큼이나 기업부채 위험도 크다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 IMF 외환위기·금융위기 때보다 더 높아진 위험도
이 같은 기업부채의 빠른 증가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한국의 가계부채와 맞물려 큰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BIS 국제결제은행에서 조사하는 부채위험 지표인 '신용갭' 그래프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용갭은 가계와 기업부채를 합한 민간부채가 실물경제와 비교해서 얼마나 많이 늘었는지를 보는 겁니다. 부채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나면 신용갭이 커지겠죠. 통상 신용갭이 2% 미만이면 안전하다고 보고 2~10%는 주의해야 하는 단계, 10%를 넘으면 경보 단계로 봅니다. 실제로 각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의 3분의 2는 신용갭이 10%를 넘었을 때 발생했다고 합니다.
지난 2분기 우리나라 신용갭은 15.6%로 지난해 3분기 최고점을 찍었던 17.7%보다는 떨어졌지만 위험수위 10%를 2년 3개월 연속으로 넘어섰습니다. 43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3위로 신용갭이 높아 위험합니다.
위 그래프를 봐도 알 수 있지만, IMF 외환위기 당시 13.2%, 금융위기 다음 해인 2009년 2분기 13.2%와 비교해도 훨씬 높은 수준입니다. 특히 최근에 대출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큰 위기가 올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지난 22일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서 "특히 우리나라는 2022년 하반기 이후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폭 낮아진 것으로 조사됐다"며 "그동안 누증돼 온 가계·기업 부채, 높은 부동산가격 등이 금리 상승에 따른 유동성 축소를 계기로 금융시스템 불안을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적지 않다"며 위기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DBS 그룹 홀딩스의 마 티에잉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한국은 경제 생산에 비해 기업 부채가 눈에 띄게 증가한 두 주요 아시아 국가"라며 "이는 금리 충격이나 수출 부진에 따른 소득 충격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바로 지금 금리 충격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고, 수출이 부진하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경고입니다.
국제금융협회도 "낮은 금리 때문에 그동안 많은 기업이 싼값의 대출로 연명해왔지만, 앞으로는 대출 비용이 오르면서 부도가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국제금융협회가 세계를 향해 던진 이 경고의 제일 앞 열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서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제금융협회의 지적대로 대출로 연명해오다 부도 가능성이 높아진 기업들을 어찌 처리할지는 정부와 금융당국의 몫입니다.
박찬형 기자 (parkch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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