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실리콘밸리에서 '맨땅 헤딩하기'…이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살아남는 법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내년 한국 경제가 "경기 침체 경계선에 놓여있다"고 지난 20일 밝혔습니다. '경기 침체' 우려를 총재가 직접 발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거듭되는 고물가 상황에 금리인상 기조를 이어가는 게 맞지만, 경기 위축 상황과 겹쳐 지금과 같은 통화정책 방향을 고수할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팍팍합니다.
경제 상황이 위축되는 시기엔 투자사들도 지갑을 닫습니다. 소비 매출 증대로 투자 성공을 보장받기가 어려우니까요. 국내외 스타 유튜버 시장 확대와 더불어 가파르게 성장한 스타트업 '샌드박스'도 투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도티, 곽튜브 같은 걸출한(?) 유튜버들이 소속된 업계 1등인데, 최근 일부 구조조정도 감행할 정도로 상황이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뜨겁게 불었던 퇴사 열풍과 '경제적 자유'라는 트렌드도 살짝 움츠러들었습니다. 자산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역시 근로소득이 제일'이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는 시절로 돌아왔습니다. 업계 선두를 달리던 스타트업들이 줄줄이 매각 시장에 나왔고 창업 열기를 주도하던 미국 IT 기업들은 대규모 감원에 나섰습니다.
"트래픽? 하나도 안 줄었다. 스타트업은 시대정신"
실리콘밸리에 진출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한인 창업가 인터뷰를 비롯해 자신의 일에 진심인 직장인들, 투자를 받기 위한 스타트업들의 무삭제 IR 피칭 영상, 스타트업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웹 예능까지. 혁신과 일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들을 기획 제작해왔습니다. 어느덧 창업을 앞두고 있거나, 혹은 창업 초기에 고민하는 이들의 '필수 코스'로 입소문이 난 이 채널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처음엔 1인 미디어였습니다. 애초에 콘텐츠 사업을 하려했던 것도 아닙니다. 학부생 시절부터 여러 방면에 관심을 두고 제조 등 커머스, 커뮤니티 사업 등을 연이어 창업한 끝에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왔습니다. (저희 코너와도 잘 어울리죠?)
1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시작해 직원 수 21명의 법인을 세우기까지. 90년생 만 32살의 대표는 어떤 '혁신론'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폭설이 내린 날, 서울 강남구에 있는 EO 스튜디오에서 김태용 대표를 만났습니다.
- 경제 관련 유튜버들 참 장사 안 되는 시절이다. 스타트업 특화된 콘텐츠인데 요즘 같은 경기 불황기에 살림살이가 어떤가?
"비즈니스 문의가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트래픽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사실 늘 놀랍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대개 30세쯤 되면 경제 활동을 하고 주식 투자나 재테크에 뛰어든다. 이 수요가 적용된 콘텐츠 구독자 수가 대략 250만 명 정도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재테크 영역이 아니라 스타트업에 특화한 콘텐츠인데 49만 명씩 구독자가 모이는 걸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주식 재테크에 대한 관심에 비하면 30분의 1도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치를 뛰어넘은 거다. 그만큼 젊은 사람들이 자기 일을 주도적으로 하고, 일을 만들고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이런 창업과 커리어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싶은 생각이 든다."
- 어려운 상황에서도 EO는 최근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투자 성과는 어땠나?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시드머니는 류중희 대표님, 신재식 대표님,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플루언서 마케팅하는 <데이터블>이라는 회사에 3억을 받아 시작했다. 구조조정하는 회사도 늘어가고, 몇 가지 계약이 어그러지면서 저희도 힘들 때가 있긴 했지만 글로벌 시장으로 성장의 방향을 틀었던 게 주효했다. 글로벌 채널도 스타트업 CEO들을 만나 대표한 콘텐츠 등이 올라가고 있는데, 거의 하루에 천 명씩 구독자가 늘고 있다. 한국에만 있었으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최근 프리 시리즈A 수준의 20억 규모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 1인 미디어로 시작해서 이만큼 성장했다. 여러 차례의 창업을 거듭했다고 들었다.
도전이 습관 되면 두려움도 없어져
생각 외로 맨 땅 헤딩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42일 동안 40명의 창업자,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등을 만나고 그 중 스토리가 있는 16명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이를 다듬어 만든 <리얼밸리>라는 콘텐츠 시리즈를 2017년 '태용' 유튜브,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습니다. 두 달 만에 4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 맨땅 헤딩을 즐겨하는 편인가?
"창업한 분들은 아마 공감할 텐데, 사업을 하다 보면 좋은 점이 있다. 도전하는 게 습관이 돼서 뭔가 새로운 걸 할 때 딱히 큰 용기가 필요 없게 단련이 된다. 두렵고 막연하고 이런 감정은 창업 초기 때야 있었지만 처음의 장벽을 넘고 나면 뭔가를 시도할 때 두려움이 꽤 사라진다."
- 2017년 태용으로 개설한 채널을 2년 뒤 EO로 바꿨다. 앞으로도 더 높은 성장이 목표겠지만 지금껏 본인 채널의 '티핑 포인트'는 무였다고 생각하나?
"시청자, 타깃 오디언스(target audience)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채널은 이 사람들의 니즈에 콘텐츠를 맞추려고 매우 노력한다. 규모가 커지더라도 매스미디어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지 않았던 게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기업가 정신을 갖고 스타트업에 참여하거나 혹은 스스로 기업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맞닥뜨릴 수 있는 장벽을 없애주는 것. 그 목표에만 충실했다. 특히 영상 초반부에 이 타깃 오디언스들이 왜 영상을 믿고 봐야하는지, 생전 처음 보는 스타트업인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빠르게 제시하려 했고 그 밖에 군더더기를 없앴다. PD 채용 할 때도 깔끔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지 그 능력 여부를 굉장히 많이 본다. 어느 지역에서 우리 콘텐츠를 주로 보는지 데이터를 살펴보는데 딱 강남 테헤란로, 성남 이렇게 두 지역이 많이 찍힌다. 구독자 전략이 맞았고 실제로 IT 사업하는 분들이 많이 봐주고 계신다."
- 1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살아남는 것도 꽤 치열한 일이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세운 원칙 같은 것이 있었나?
"사실 채널이 뜨면서 나 개인에게 이목이 쏠릴 때 좀 혼란이 오긴 했다. 시청자들이 나라는 개인에 관심과 기대가 커지고, 실리콘밸리 왔다 갔다 하니까 꼭 유학파라고 생각을 하고. 어떤 분은 인터뷰 하다가 갑자기 영어로 저한테 말을 거시거나, 제가 블록체인이나 이런 것도 다 알거라 생각하고 어려운 이야기 갑자기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콘텐츠 만들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고 머리에 지식을 채우고 수준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을 해서 좀 방황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달 동안 힘들다가 결국 사람이 다 모자란 부분이 있고, 나는 내가 잘 하는 것만 잘하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좀 편안해졌다."
- 그렇게 찾은 자신만의 강점과 무기는 뭔가?
문제는 꼭 '시장'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
"개인적으로도 '스타트업 하는 사람들 멋지다'라는 생각이 컸다. 채널 운영하면서 꼭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성공시켜야지, 얼마나 돈을 벌어야지 이런 생각보다는 꾸준히 만들어보자 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제작했다. 채널로 돈을 벌지 못할 땐 한 1년 정도 친구 회사에 마케팅 팀장 같은 직책으로 들어가서 주3회 정도 일하고 월급받기도 했다. 지속할 수 있던 원동력이 바로 구독자였다. 채널을 열었을 때 구독자가 약 3천 명 정도였는데, 이때부터 봐주시던 분들이 내가 만나서 뭔가 배우고 싶은 창업가이자 '진성 구독자'였다. 그래서 실제 초기부터 구독하고 계신 분들이 출연도 많이 해주면서 채널을 같이 키웠다. 콘텐츠 제작 자체가 사업을 키우는 좋은 수업이었다고 생각한다."
- 침체된 경기 상황에서 '스타트업'의 시장 가치는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나?
"산업적으로는 잠깐 침체기일 수 있지만 동시에 스타트업은 시대적 무브먼트라 생각한다. 예전만 해도 10-20대 분들이 '스타트업 같은 데 왜 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 통계를 보니 구직자 10명 중 7명이 스타트업에 가고 싶다고 응답했더라. 예전엔 뭔가를 창조하려면 큰 공장을 지어야 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본인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소수 집단에서도 잘 해결하면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경기 침체랑 상관없는 흐름이다. 스타트업이 언젠가 주류 문화가 되었을 때 지속적으로 신뢰를 갖고 들여다볼 수 있는 글로벌한 '스타트업 시대의 블룸버그'가 되는 게 EO의 목표다."
- '될 만한' 혁신 기업과 '진짜 인사이트'를 가진 창업가를 골라내 콘텐츠를 만드는 사업이다 보니 안목도 중요할 것 같다. 자기 PR 과잉 시대라 할 만한데, '진짜'를 찾는 기준이 뭔가?
"진짜 가짜를 확언할 수 없는 동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본다. 지금은 혁신 같아도 몇 차례 연속해서 의사결정을 실수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갈 수도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는 회사의 재무 상태를 확인하고 문제가 없는지 등을 투자사 등과 크로스체크하고 나서는 두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지 본다. 먼저 이 회사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문제'를 풀고 있는지, 그리고 푸는 과정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결, 진보하고 있는지'다."
- 천 명에 가까운 기업가들을 만나는 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 자체로 '사업 어드바이스'였을 것 같다. 이를 토대로 창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나.
"혁신형 창업은 리스크가 높고 장기적 목표를 수행해야하기 때문에 실패가 많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가장 버려야할 건 조급한 마음이다. 저는 부자들 중에서도, 어중간한 부자가 아니라 수 천 억에서 조 단위 되는 사업가들이 '돈은 정말 따라오는 거다'라는 말을 거듭 반복해 들으면서 그 의미를 체화했다. 단기 목표에 급급하지 않고 실제 창업에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무척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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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기자choi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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