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줌인] 옮겨심기에 대한 소회

이순용 2022. 12. 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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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민재 국립정신건강센터 입원제도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갈민재 국립정신건강센터 입원제도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얼마 전 나는 이직을 했다. 3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일했던 곳을 나와 새로운 곳에 오게 됐다. 그 사이에 3개월간 모처에서 단기로 일을 하기도 했다. 짧은 기간 동안 두 번 옮겨심기를 한 셈이다. 보다 나은 오늘과 내일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애초에 나는 변화를 썩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평생 직장’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나는 익숙한 환경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갈민재 국립정신건강센터 입원제도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일을 하는 것이 좀 더 편안하다. 땅 밑으로 깊숙하게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고 줄기가 튼튼해지면 포근함과 안정감을 느껴 잎사귀가 더 싱그러워지는 그런 종인 것이다.

큰 결정인 만큼 이직 전에 충분한 숙고를 거쳤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훌륭한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도 했고 업무 자체도 내가 잘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새 직장에 출근한 첫날부터 내 안의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업무, 낯선 용어와 제도들을 접하니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서 목이 칼칼하고 눈이 뻑뻑한 건데 혹시 코로나에 걸린 것은 아닌지 사소한 것 하나도 마음에 걸리고 걱정이 됐다. 급기야 괜히 이직을 했나, 내가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내가 일을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뿌리가 주변 토양을 파고들어 양분을 찾아 뻗어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경직되고 움츠러들었고 줄기와 잎사귀는 불어오는 바람에 사정없이 휘둘렸다.

물론 내가 좀 ‘온실 속의 화초‘ 같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요즘과 같이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의 역할 변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새 학년, 새 학교로의 진학, 졸업 및 취업, 이직이나 승진, 결혼 또는 이혼, 출산과 양육. 그 외에도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수차례씩 역할 변동을 겪고 이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 큰 도전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나처럼 다소간의 불안 증상이 생길 수도 있고 더불어서 불면, 우울과 같은 증상도 동반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증상이 심해서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기능 영역에 현저한 손상이 있다면 정신건강의학과적으로 ’적응 장애‘로 진단할 수 있고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1, 2주 정도의 적응기를 거친 이후 지금은 특별히 크게 불안하지도, 손에 땀이 나거나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영역에서의 업무이기 때문에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고 긍정적인 의미의 스트레스도 여전히 받고 있다. 그럼에도 차분하게 하루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무도 없는 황야에 덩그러니 혼자 옮겨 심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내 주변에는 새 직장, 새 업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업무 환경을 만들어주시고, 교육해주시고, 실무 관련 참관도 하게 해주신 동료, 선배님들이 있었고 그랬기에 연착륙이 가능했다.

인간을 포함해서 지구상에 사는 모든 동식물들에게는 두 발 내지 뿌리를 딛고 살아갈 ’지면‘이 중요하다. 여기서의 지면은 비단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땅일 뿐만 아니라 영국의 정신의학자 존 볼비 (John Bowlby)가 애착이론을 통해 이야기한 ’안전기지 (secure base)‘ (어린 시절의 엄마와 아이 사이의 안정적인 상호관계가 정상적인 심리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개념), 즉 한 인간의 정서적 기반으로서의 의미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지면 위에 단단하게 서 있어야 작게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고, 크게는 일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풍파에 흔들려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 혼자서는 아무리 단단히 서 있으려 해도 한계가 있다. 우리 모두는 가족간에, 친구간에, 직장 동료간에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지탱해줄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얽히고설킨 땅과 나무는 웬만해선 잘 뽑히지 않고 튼실하지 않은가. 그러한 토양이라면 새로 옮겨 심은 화초가 아무리 온실에서 온 연약한 것이라 하더라도 든든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계절은 이제 어느덧 추운 겨울이지만 내 몸과 마음의 뿌리는 조금씩 포근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앞으로 잎사귀가 좀 더 싱그러워지길 바라 본다.

이순용 (sylee@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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