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황소의 피’ 마시던 그들처럼…자포자기의 심정, 투지로 불사르리

한겨레 2022. 12. 2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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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김남희의 걷다 보면]김남희의 걷다 보면 헝가리
엄마 떠나보내고 온 헝가리
따뜻했던 부다페스트 온천
소박한 수도원의 쉼 쇼프론
무너진 일상서 찾아온 회복
도보 이슈트반의 동상이 있는 에게르의 광장. 김남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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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가 누군지 알겠어?”

“그럼 알지. 알고 말고, 우리 딸.”

엄마가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였다. 고통을 참으며 희미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과 그만큼이나 흐릿하던 엄마의 목소리. 사라져 가던 엄마의 그 목소리와 얼굴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내 존재의 근원이 사라진 순간, 내 삶의 의미도 사라졌다. 잠이 달아난 자리를 눈물이 채웠다. 내가 여행만큼이나 사랑하던 일상은 쉽게도 무너졌다.

엄마가 떠난 지 29일이 되던 날, 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에 서 있었다. 엄마가 몇 달은 더 버텨줄 거라 믿었기에 포기했던 여행이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어떤 다짐이나,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려는 각오도 없이 떠나온 터였다. 몸과 영혼에 새겨진 오랜 습관의 힘은 강력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숟가락을 들었고, 신음 같은 한숨을 뱉으며 짐을 쌌다.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부다페스트로 날아갔다. 어부의 요새 테라스에 앉아 다뉴브 강을 내려다보며 와인을 마시던 순간에도, 타인의 시선 속에 프러포즈를 주고받는 연인을 구경할 때도,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트램이 꼬리를 끌며 강변을 지나갈 때도, 나는 시들했다.

3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부다페스트 시나고그. 김남희 제공

성에 미친 남자가 50년째 짓는 성

모든 걸 공허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에게 격렬한 감정이 일어난 건 돈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의 입장권을 끊는데 어쩐지 기분이 싸했다. 첫 환전이라 아직 헝가리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지만 좀 비싼 게 아닌가 싶었다. 티켓을 받고 나서 확인하니 3만 원이었다. 유대교 회당을 들어가기 위해 3만 원의 입장료를 지불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환불해 달라고 할 용기도 없었다. 시나고그 방문객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내게는 딱히 의미도 없는 데다가 시오니즘을 찬양하는 글귀가 가득해서 불편했다. 아무 생각 없이 3만 원짜리 교회 입장권을 손에 쥔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내 등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고 다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건 그렇게 시나고그가 되었다. 3만 원으로 달아오른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건 두 개의 공연이었다.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네덜란드 피아니스트 윱 베빙의 피아노 독주회. 공연보다 더 좋았던 건 가격이었다. 전자는 에스(S)석 표가 2만3000원, 후자는 1만9800원이었다. 이런 공연을 부담 없는 가격에 누리는 이 도시의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부다페스트에서 제일 좋았던 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이었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아름다웠던 세체니 온천도, 터키식 욕탕이 있던 루다스 온천도 떠나기가 싫을 정도였다.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타고 세 시간쯤 서쪽으로 향하면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마을 쇼프론이 있다. 역사적인 건축물과 임플란트 투어로 유명한 곳이다. 이 마을 인구의 2.5%가 치과의사인데 저렴한 비용으로 임플란트를 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도 찾아온단다. 나는 아직 이가 괜찮아서 치과는 패스, 수도원에서 쉬기 위해 찾아갔다. 뭘 한 게 있어서 쉬러 가느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작고 고요한 마을에서 이틀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쉬고 싶었다. 여행에서는 뭔가 하지 않으면 엄청난 손해를 보는 듯한 기분에 빠지기 쉬운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너지가 충분치 않아 여행하기도 전에 쉬자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나 수도원 숙소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1710년에 세워진 수도원을 2009년에 개조했는데, 수도원의 경건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안온한 공간이 되었다. 고딕 양식의 소박한 수도원은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해 고요했다. 아침과 저녁을 먹는 식당의 천장은 프레스코화가 근사했고, 무엇보다 박공지붕의 도서관이 인상적이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아침저녁으로는 산책을 했다. 산책길에 만난 독일인 부부가 알려줬다. 근처에 50년 동안 혼자서 성을 지은 미친 남자가 있다고. 수도원 뒷길을 산책하다가 그 미친 남자가 지은 성을 찾아 나섰다.

스티븐 타로디라는 남자가 이 마을에 땅을 산 건 1951년. 평생의 소원이었던 자기만의 성을 갖기 위해 직접 돌을 깎고, 나무를 잘라 성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려 5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성실하게. 20m 높이의 탑까지 있는 성을 만들고 그는 201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그의 가족이 입장료를 받고 성을 공개하고 있다. 막상 가보니 성은 여기저기 방치되거나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인 상태이고, 빈말로라도 아름다운 성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제대로 미친 한 사내가 집념으로 일구어놓은 성취여서 어쩐지 애잔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게 되는 곳이었다. 평생에 걸친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신통치 않은 결과물이다. 이 성을 짓는 동안 그 남자는 점점 쪼그라들고, 그가 작아지는 만큼 성은 점점 커졌을 것이다. 투박한 이 성도, 이 성을 짓느라 일생을 소진한 남자도 내가 아는 사람들 같았다. 자식이라는 미완성의 성을 짓느라 일생을 소진하다가 정작 자신의 성은 짓지도 못하고 떠난 내 엄마와 아빠. 꿈 하나를 좇느라 다른 모든 것은 버려야 했던 나. 모두의 마음에는 이렇듯 평생을 헌신했지만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한 성이 하나씩 있지 않을까.

한 남자가 50년간 지은 성.(쇼프란) 김남희 제공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아름다운 세체니 온천. 김남희 제공

묘하게 숨통 트인 공동묘지

성을 구경하고 오는 길, 근처의 공동묘지에 들렀다. 고즈넉한 정적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젊은 날에도 나는 공동묘지에서 더없는 평화로움을 느끼던 사람이었는데, 내 생명의 근원이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니 더 애틋한 공간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못된 버릇마저 들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불행을 저울질하는 버릇. 그래도 엄마는 내게 50년 넘게 내 곁에 머물러 줬으니까. 그래도 엄마는 노년에라도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하셨으니까. 그래도 엄마는 나에게 작별할 시간을 주었으니까. 1, 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청춘들의 묘지 앞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아들과 남편과 오라비를 가슴에 묻고 평생을 견뎠을 이들을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하다니, 몹쓸 짓임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나는 고작 이런 식의 위로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아무리 고단한 날들에도 삶을 향한 의지를 단 한 순간도 잃지 않았던 엄마. 사는 일이 지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수줍게 고백하던 엄마. 엄마가 그토록 갈망했을 오늘을 나는 그저 습관처럼 살아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래서 비난받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마로니에와 전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 낡은 십자가 위로 내려앉는 따사로운 햇살, 건조하고 맑은 가을날의 공기, 세상을 떠난 이토록 많은 영혼들…. 그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죽은 자의 공간은 지금의 내게 엄마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삶은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향하지만 그래서 죽음은 삶을 끌어주기도 하는 걸까. 공동묘지를 지나고 나니 걸음이 조금씩 나를 밀어갔다. 이제 좀 움직여 볼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헝가리 와인의 성지 에게르로 향했다. 토카이가 달콤한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하다면 에게르는 레드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황소의 피’(헝가리어로는 Egri Bikaver)라고 불리는 와인이 이곳의 특산품. 도시의 언덕에 있는 에게르 성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성에는 헝가리인들의 자부심이 배어있는데 역시나 와인과 얽혀있다. 1522년, 비엔나로 진군하던 오스만 터키 군이 에게르를 침략했다. 에게르의 성주였던 도보 이슈트반의 지휘 아래 항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성주는 2천 명의 군인으로 8만 명의 터키군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 진작에 전의 상실 상태. 결사 항전의 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다)으로 와인 저장고를 열었다. 남은 와인은 몽땅 군인들 차지가 되었다. 와인을 진탕 퍼마신 에게르 남자들은 수염 위로 붉은 와인을 뚝뚝 흘리며 터키군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은 터키군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황소의 피를 마시고 싸우는 미친놈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술김에 괴력을 발휘했다는 건데, 어쨌든 역사적 진실은 에게르인들이 격렬한 저항으로 터키군의 침략을 저지했다는 것. 물론 ‘와인빨’ 떨어진 몇 년 후, 결국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 후 도보 이슈트반은 헝가리인에게 영웅으로 각인되었고, 그의 청동 조각상이 우뚝 서 있는 에게르 중심 광장도 그의 이름을 땄다. 이 일화는 소설과 영화로도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소설이 게자 가르도니의 <에게르의 별>. 헝가리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도 꼽힌다.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과 한산대첩 정도의 이야기인 듯.

3백년 된 수도원을 개조한 쇼프란의 호텔. 김남희 제공
국회의사당이 내려다보이는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 김남희 제공
에게르의 특산품 와인 황소의 피. 김남희 제공

‘황소의 피’ 마시며 한 다짐

그런 에게르에 왔으니 ‘황소의 피’를 안 마시고 갈 수는 없다. 채석장 터에 자리한 와이너리는 디자인부터 인상적이었다. 꽤 유명한 곳인지 폴란드에서 온 20대 청년들이 와인을 ‘박스 떼기’로 사고 있었다. 순전히 여기 와인을 사려고 왕복 8시간을 운전해서 왔단다. 우리는 친절한 매니저의 호의로 대중적인 와인부터 최고급 ‘황소의 피’까지 예닐곱 가지를 천천히 시음했다. 맛보는 와인마다 제각기 다 맛이 좋아 깜짝 놀랐다. 한 시간 넘도록 수고한 매니저를 위해 ‘박스 떼기’를 하고 싶었지만, 들고 다닐 수가 없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나는 만 원대의 스파클링 와인을, 친구 크리스탈은 가장 비싼 황소의 피를 한 병씩 샀다.

소중히 들고 온 와인을 마시던 밤, 나는 5백 년 전의 어느 밤 전투를 앞두고 와인을 퍼마셨을 이 도시의 남자들을 생각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죽음을 불사하는 투지로 승화되는 기적의 순간을 상상했다. 내 생의 의지가 무참히 꺾여버린 이 날들이 생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걸음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나는 에게르의 군인들처럼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들이 술기운을 빌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투지를 불태웠던 것처럼. 나도 이 먼 곳까지 날아와 황소의 피를 마시며 삶의 불꽃을 다시 피워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싸울 거야, 이 무기력한 날들과. 살아낼 거야, 엄마의 몫까지. 벌어진 상처 위로 눈물을 쏟으면서도 나는 앞으로 나가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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