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당하는 내딸 살려달라” 성매매 아동 구해낸 그 남자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2. 12. 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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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아동 학대를 방관하는 주요 이유로는 ‘남의 집안일’이라는 점이 꼽힌다. 그 가정만의 복잡한 사정도 모른 채 끼어들었다가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만 낭비하게 될 상황이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아동 학대 피해자에게 무력감을 안겨준다. 집안일이라는 점을 근거로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청부살인업자인 조(왼쪽)는 상원의원의 의뢰를 받고 그의 딸을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린 램지 감독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는 과거에 경험한 가정 폭력의 상처로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며 사는 청부살인업자 이야기다. 어린 시절 그와 어머니는 같은 집에 살던 남성으로부터 육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았지만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성인이 된 그는 군인으로서 전장에 뛰어들었는데 너무 많은 참상을 목격하며 정신이 한층 황폐해진다. 아동 학대와 전쟁의 트라우마로 매일같이 난도질되는 그의 세상에 어느 날 학대 받는 소녀가 나타난다. 사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소녀를 구해줄 수 있을까.

아동 학대와 전쟁을 경험한 조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그는 매일을 견뎌내듯 산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가정 폭력 피해 아동, 청부살인업자가 되다
영화는 자살 충동으로 괴로워하는 남자 조(호아킨 피닉스)의 침대를 비추며 시작된다. 비닐봉지로 머리를 싸맨 그는 어린 시절 같은 집에 살던 성인 남자에게서 받았던 학대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 한다. 그 남성은 조에게 늘 ‘너는 너무 나약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조의 어머니를 때리기 위해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으며, 그때부터 조는 옷장에 숨어 자살을 꿈꿨다.
조는 청부살인업으로 연명한다. 자신과 함께 삶을 견뎌내준 어머니를 먹여 살리는 것은 그에겐 중요한 일이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참전 후에 그의 트라우마는 한층 심해졌다. 자기 앞에서 죽어나가던 약자들의 이미지는 그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전쟁터에서 목도했던 것과 조금만 비슷한 모습을 봐도 그는 죽음의 상이 떠올라 괴로워한다. 그는 자살 시도를 하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 자신과 함께 학대당했던 어머니에 대한 의리가 겨우 버텨내는 삶의 원동력일 것이다. 연약한 그녀 또한 아들을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조 역시 스스로 숨통을 끊기 직전에 늘 현실로 복귀한다.
가정 폭력 피해자였던 어머니는 인생을 견뎌냈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건 그녀가 아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방식이었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죽지 않고 살기도 버거운데, 내 도움 필요한 아이를 만났다
호구지책으로 선택한 청부살인업으로 그는 의뢰인들의 신뢰를 받으며 어머니와 둘이 살아가기에 무리 없는 수입을 유지한다. 어느 날 그의 소문을 들은 상원의원이 자신의 딸을 찾아오라는 임무를 주며 현찰 5만달러를 제시한다.

의뢰인의 미성년자 딸인 니나는 성매매에 이용당하고 있었고, 조는 범죄 현장에서 니나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구출 장면은 인상적으로 연출됐는데 긴박함이 생략됐다는 점에서다. 린 램지 감독은 조가 경비와 소아성애자를 죽이는 장면을 CCTV 화면을 통해 건조하게 처리한다.

미성년자 성매매범 같은 인간 이하 범죄자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느라 시간을 쓸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반영됐을지 모른다. 그는 시종일관 경제적인 연출법을 택하면서 이 영화를 1시간29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완성했다.

조가 처음으로 니나를 구출하는 장면은 CCTV 화면으로 간략하게 처리된다. 생략과 압축을 통해 감독은 이 영화를 1시간29분의 짧은 러닝타임으로 완성했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29, 28, 27...” 니나는 숫자를 역순으로 센다. 성매수범의 그 행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목숨을 건진 니나는 조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볼에 입을 맞추려 한다. 성인 남성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안 그래도 된다”는 말로 니나를 밀쳐낸다.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려는 남성만이 드글댔던 니나의 인생에서 조는 다른 반응을 보여줬다. 세상엔 그녀를 도와주고서도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어른이 엄연히 존재함을 알려준 것이다.
조는 학대당하는 니나에게서 자신과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그러나 미성년자 성매매를 하던 조직은 사실 정관계 주요 인사가 엮인 거대 조직이었고, 니나를 다시 납치한다. 그리고 조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 조를 죽이러 집에 침입한 그들은 침대에 누워 있던 어머니를 살해했다. 조는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해 그녀를 안고 물에 빠진다. 어머니와 함께 수장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어차피 그에게 삶이란 모친을 위해 견뎌내는 것이었을 뿐이다.

‘40, 39, 38…’ 숫자를 거꾸로 세며 물 아래로 가라앉던 그에게 니나의 이미지가 불현듯 떠오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숫자를 역으로 헤아리며 밑으로 밑으로 향하는 니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는 의지를 내 물 밖으로 나온다. 그녀를 다시 한번 구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죽은 어머니와 자신을 수장하려고 한다. 어머니는 그를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여기에 없었던’ 두 사람이 ‘여기에 있게 되는’ 서사
끔찍한 아동 학대와 전쟁 참상을 경험한 조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했다. 늘 과거의 고통에서 헤매던 그는 죽음으로써 삶에서 해방되길 원했다. 조는 ‘여기에 없었던’ 것이다. 엄마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꾸역꾸역 살았던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삶을 버티지 않아도 될 조건이 완성됐다.

그렇지만 어머니와 어떻게든 연명한다는 과제가 사라졌음에도 그는 움직인다. 니나를 구출하는 목적은 다른 보상이 아닌 오로지 한 생명을 구하는 데만 있다. 그의 생각이 가는 방향으로 몸도 같이 향한다. 반면, 명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단지 돈벌이었을 뿐인 전쟁이나 청부살인을 수행할 때 그의 몸과 마음은 따로 움직였다. 이 영화는 줄곧 ‘여기에 없었던’ 남자가 처음으로 ‘여기에 있게 되는’ 서사인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니나가 납치된 장소에 당도한 조는 그곳에서 성매매 조직의 최종 결재권자인 주지사의 시체를 발견한다. 조가 도착하기 전 니나가 먼저 그를 살해한 것이다. 조를 만나기 전 니나 역시 ‘여기에 없는’ 사람이었다. 숫자를 거꾸로 세며 성매수남의 행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그녀는 어서 삶에서 해방되길 고대하던 조와 닮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조를 만난 이후엔 주지사를 처단해 스스로를 구하는 적극성을 발휘한다.

그녀는 주지사를 죽인 손으로 식사를 하며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다. 자신에게서 그 어떤 보상도 원치 않으면서 도움을 준 어른을 보며 그녀는 세상에서 희망을 보게 됐다. 니나를 구해낸 조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며 강한 자살 충동을 느끼는 조를 니나가 깨우며 얘기한다. “조, 나가요. 아름다운 날이에요.”

니나를 구한 조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또 다시 확인한 조는 강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방관은 또 다른 형태의 아동 학대다
상처를 안고 살던 조는 스스로를 챙기기에도 버거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니나가 당하는 학대를 ‘남의 일’로 치부하지 않았다. 학대 속에서 오랜 기간 고통 받았던 자신의 삶을 니나가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지 모른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 침잠하던 니나에게 조가 손을 건넸다. 그녀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데는 그 손길 한번이면 충분했다. 어린 시절 조에게도 그런 손길이 닿았다면 인생이 그토록 외롭진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날이에요” 니나는 절망감에 침잠하는 조를 깨운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많은 아동 학대 사건에서 주변 어른의 역할 부재가 지적되곤 한다. ‘옆집 일’ ‘타인의 사정’이라고 외면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아이가 학대에 노출되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져서만은 아니다. 아이의 입장에선 세상에서 외면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동 학대를 알고도 방관하면 그 아이는 직접적 폭력에 더 오래 노출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상처를 안게 된다. 조에게 니나는 어떤 인연도 없는 아이였지만 그녀가 학대 당한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그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 책임을 다함으로 인해 조는 니나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수렁에서 건져낸다.

조는 ‘아름다운 날’이라는 니나의 말에 “아름다운 날이구나”라고 화답한다. 매일이 죽고 싶은 날이었던 두 사람에게 ‘아름다운 날’로 기억할 수 있는 하루가 생긴 것이다. 아름다운 날의 추억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된다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아파하는 대신 미소지을 수 있는 순간도 더 늘어날 것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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