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느려진다네, 천천히 움직여야 해”

한겨레 2022. 12. 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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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노년의 의미
노화 겪으며 서운함·불안감 느껴
현재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려 해
나의 정체성을 과거에 두면 불행
자신과 친해질 기회 놓쳐선 안돼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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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제가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탁월한 리더 상’을 받게 됐을 땝니다. 졸업 후 미국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 것과 귀국 후 회사에서 한 일들을 좋게 본 것이지요. 실은 성공보다는 학위 과정에서 탈락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을 목표로, 간신히 고통스럽게 공부했던 박사 과정이었는데, 뜻밖이고 감격적이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1980년에 석사 과정으로 첫 유학 한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만난 스티브 힐스 교수님입니다. 교수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헤매는 가난한 유학생인 저를 보듬고 끌어주셨습니다. 이미 은퇴하신데다 다른 주에 살고 계셨지만, 교수님은 감사하게도 제 초대에 비행기를 타고 기꺼이 와주셨습니다.

그런데 힐스 교수님을 공항에서 픽업해서 학교로 모시고 온 한 젊은 학생이 차에서 내리시는 교수님을 좀 급하게 모시느라 차 문에 교수님의 안경이 부딪혀 망가졌습니다. 당황한 저와 그 젊은 학생에게 교수님은 늘 그러셨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늙으면 좀 느려진다네. 좀 천천히 움직여야 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죄송하다는 생각만 했지 그 말씀의 뜻을 깊이 이해하진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50대 중반, 아직 속도와 성과의 세계에 있을 때였습니다.

리제와 케테의 대화

제가 신체적인 노화를 처음 느낀 건 50대 후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출장 때였습니다. 호텔 테라스에서 바깥 경치를 내다보는데 갑자기 눈앞에 날파리들이 날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건가’ 싶었지요. 귀국 뒤 받은 안과 진료에서 ‘비문증’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의사는 눈의 수정체가 탁해지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당분간 그대로 지내보라고 했습니다. 좀 불편해도 참고 지냈는데 은퇴하고 나서는 증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나중엔 신문을 읽는 것도,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도 힘들 뿐만이 아니라 골프 코스에 나갔을 때는 공이 떨어지는 위치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엔 양쪽 눈 모두 인공수정체로 교체하는 백내장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광명은 찾았지만 안구건조증은 더 심해졌습니다. 몸의 한계를 느끼고 마음도 늙어가는 씁쓸함에 젖어들었습니다. 성장과 발전이란 젊었을 때의 얘기고 이젠 노화, 퇴화라는 내리막만 남았을 뿐이라는 서글픈 생각이었지요.

한동안 이런 마음으로 지내다가 우연히 2021년 제주도 포도뮤지엄에서 있었던 ‘아가, 봄이 왔다’는 전시회에 가게 됐습니다. 거기서 처음 접한 세계적인 독일 판화가이자 조각가인 케테 콜비츠의 일기 한 구절이 거의 충격적일 만큼 마음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승연 화백에게 부탁해서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케테의 큰아들 한스의 딸인, 손녀 유타 봉케콜비츠가 펴낸 <케테의 일기책들>의 2018년 개정판이었습니다. 케테가 1921년 11월2일 위령의 날에 쓴 일기는 여동생 리제가 당시 월간지 <노년의 의미에 대하여>에 쓴 글에 대한 감상문이었더군요. 케테가 인용한 리제의 글은 이렇습니다.

“노년이란 청춘이 가졌던 힘의 나머지가 아니라, 온전히 새로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커다란 무엇이다.”

“영원한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리제의 글에 대해서 케테 콜비츠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적고 있습니다.

“월간지 <노년의 의미에 대하여>에 실린 리제의 짧은 글은 좋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단순히 썼다. 노년에 갖는 이런 새로운 느낌은 나도 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서 그 느낌은 지난 일이 되었다. 몇년 전 강하게 가졌던 그 느낌은, (아들) 페터의 죽음이 나를 바깥세상으로의 문을 닫게 했을 때였다. 당시 나는 내 안의 무엇인가가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늙음이란 지속적 발전이라는 의미였다. 지금 나는 다시 너무나 바깥을 향해 살고 있다.”

나치에 핍박받으면서도 저항한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의 둘째 아들 페터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모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진 입대했다가, 전쟁 초기인 1914년 10월22일에서 23일 사이에 전사합니다. 케테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비통함을 마음 저 깊이에서 견뎌내고 마주하고 결국은 페터를 기념하는 조각 작품 <비통한 부모>(1932)를 만들었습니다. 강렬한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이 작품은 저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 그리고 또 다른 삶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리제는 노년이란 젊음이 연소된 후 남는 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커다란, 완전히 새로운 상태라고 했고 심지어 영원한 빛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케테는 노화는 지속적인 발전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노화가 그냥 내리막길이기만 한 건 아니구나, 단순히 소멸이기만 한 건 아니구나, 그 속에 성장의 길이 있구나, 그걸 찾자’는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노화 속에 비치는 영원한 불빛

어느 날 닥치는 은퇴와 노화는 서운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나의 쓸모없음을 절감하게 합니다. 장기근속 후 퇴직하면 내 몸과 마음에 배어든 익숙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기에 마치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회피하려고 합니다. 도망가려고 합니다. 변화한 현실, 그 팩트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오는 죽음 같은 충격을 사전에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쓰나미와 같아서 다 쓸려 갑니다. 그러한 감정적 정서적 격동기 속에서 견디고 버티며 시간을 들여 현실을 수용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도 ‘이 속에서 버텨보자, 견뎌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과거에 고정해놓으면 불행감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에고 확장이 아니라 에고 수축을 경험하게 하는 은퇴와 노화는 내가 나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비로소 나 자신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나와 친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편안해집니다. 은퇴로 인해 사회적 성취의 한계를 느끼고, 노화로 육체적 한계를 느끼면서, 이를 견디고 버틴 후 이윽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년은 삶의 현재성을 배울 수 있는 축복받은 시기입니다. 어쩌면 리제와 케테가 노화 속에서 영원한 불빛들이 비친다고 말한 게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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