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끝없는 호기심… 시같은 풍경 펼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노동집약적 작업 고집하는 허수영
우연히 마주한 일상 사진으로 남겨
캔버스에 물감으로 한겹 한겹 쌓듯
10년에 걸쳐 포개고 응집하며 기록
한 번도 보여지지 않은 세계 표현
최근에는 우주를 주제로 연작 시작
관람객 발길 붙잡아 빠져들게 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안목이란
습득하기보다는 성장하며 자라나
꾸준히 작품 접하면 고귀함 알 것
#허수영이라는 우주
“그리다 보면 흔적은 대상이 된다. 그리다 보면 대상은 재현이 된다. 그리다 보면 재현은 표현이 된다. 그리다 보면 표현은 다시 흔적이 된다. 그리다 보면 그림은 계속 변한다. 그리다 보면 이미지를 상태를 변화시키며 어디론가 간다. 그렇게 그림이 어떤 지점에 도달하면,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어떤 모호한 상태로 한 번 더 끌고 가고 싶다. 더 이상 언어화되지 않는 지점에 보다 그림다운 그림이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래서 “대상들 사이로, 그려진 것들 위로 더는 개입이 불가능할 때까지 계속 침투하듯이 무언가를 그려” 넣었다.
이렇게 계속 침투하듯 그려 넣은 이 시절 작가의 작품에는 대부분 정경이 있었다. 수풀이 우거진 들판, 눈송이 날리는 초원에서는 지난 시간의 공기와 흔적이 만든 분위기가 전해졌다. 서정적 화면은 보는 이의 발을 붙잡아 한참 그 앞에 머물게 했다. 허수영의 그림은 이번 전시에서도 보는 이의 발을 붙잡았는데 ‘머문다’기 보다 ‘빠져든다’는 맥락에서였다. 그는 최근 과거 다루었던 소재에서 벗어나 우주를 주제로 ‘우주’ 연작을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존재하는 우주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아 직접 캔버스 위에 그리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작가의 끝없는 호기심과 만날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양산동 05’
올해 열렸던 허수영의 개인전 전시장은 그래서 우주의 풍경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수많은 우주 사이에서 떠올라 눈과 마음에 남은 작품은 ‘양산동 05’(2013∼2022)였다. ‘양산동 05’는 ‘일 년’ 연작의 일환으로 2012년 입주한 광주 시립미술관 양산동 레지던시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2013년에 처음 그리기 시작해 거기서 마주하게 된 풍경과 일상을 10년에 걸쳐서 기록한 결과다. 작가는 이 그림을 위해 레지던시를 떠난 후로도 광주 근처를 지날 때면 양산동에 들러 사진을 남겼다. 사진 속 풍경을 캔버스 위에 쌓아 시간에 따라 바뀌는 장소를 한 화면에 포개고 응집했다.
#안목의 성장
예술 또는 미술은 과학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배우기도 어려운 세계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구상에서 비롯한 인공지능 페인팅의 시대가 왔음에도 그렇다. 거기에는 항상 완벽한 계산과 예상을 한 치 벗어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피천득은 ‘수필’에서 수필을 논하며 파격이라는 단어를 다음 같이 썼는데 그 파격이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파격이 담긴 예술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꾸준히, 오래, 많이 보며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이내옥이 쓴 ‘안목의 성장’이라는 책이 있다. 30년 이상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며 자라난 자기 안목에 관해 회상하는 내용이다. 안목은 사물 또는 작품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분명 배워서 습득하기보다는 성장하여 자라나는 것이다. 10여년간 어딘가에 소속되어 전시를 기획하며 매번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전시가 있는 반면 주어져서 해내야 하는 전시도 있었다. 처음에는 주어져서 읽어내야 하는 작품이 버겁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개인적 취향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거기서 비롯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재를 읽어 주신 독자분들 도움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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