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소련 박해에도 ‘한글 100년’…고려일보를 아시나요

신승근 2022. 12. 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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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인터뷰]1919년 만세운동 영향받아 창간
연해주서 한글 가로쓰기로 시작
소련 전역 하루 4만부 찍던 일간지
고려인 이주 등 견디며 1세기 생존

[한겨레S] 인터뷰

<고려일보> 김콘스탄틴 총주필

내년에 창간 100주년을 맞는 <고려일보>를 알리기 위해 한국을 찾은 김콘스탄틴 총주필이 13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3·1운동에 자극받아 1923년 연해주에서 창간해 고려인들과 동고동락한 신문 100년 역사를 설명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내년 3월1일 창간 100주년을 맞는 한글 신문이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발간하는 <고려일보>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조국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한 민족 지도자들이 1919년 3·1 만세운동에 자극받아 4년간의 노력 끝에 창간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면서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1923년 3월1일 <선봉>을 창간한다. <선봉>은 국외에서 발행한 최초의 한글 가로쓰기 신문으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와 스탈린 독재 등 격변기를 견디며 한글 신문을 100년 가까이 이어온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연해주에 터 잡았던 고려인들이 뿔뿔이 흩어질 땐 폐간 위기를 맞기도 했다. 소련의 예비검속으로 창간 주역 대부분이 투옥됐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황동훈 선생이 한글 납활자를 보따리에 숨겨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하면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강제이주 직후인 1938년 5월 <레닌기치>로 제호를 변경하고, 문맹 퇴치와 공산주의 사상 교육 등을 강화할 목적으로 소수민족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 제작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소련 정부의 지원 아래 4만부를 발행하며 소련 전역의 고려인을 독자로 둔 일간지로 위상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1년 소련 해체와 카자흐스탄 건국으로 재정 지원이 끊기고 독자들이 줄면서 다시 폐간 위기에 직면하자 제호를 <고려일보>로 바꾸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1993년 한글 면과 러시아어 면 동시 발행을 결정하고, 일간에서 격일간으로, 다시 주 2회 발행 등으로 힘겹게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매주 한글 4개 면, 러시아어 12개 면 등 모두 16면을 발행한다.

고려인 3세인 김콘스탄틴 총주필은 13년째 고려일보를 이끌고 있다. 그는 고려일보를 한국에 알리고, 한국기자협회와 창간 100주년 행사를 알마티와 서울에서 함께 개최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엿새 일정으로 한국에 들렀다. 카자흐스탄 귀국을 몇시간 앞둔 지난 13일 한겨레신문사 6층 카페 ‘짬’에서 그를 만났다. 고려인 3세인 그는 한국어보다 러시아어로 의사소통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김상욱 알마티고려문화원장의 통역과 도움을 받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국외 최초 한글 가로쓰기 신문

―한국엔 어떻게 오신 건가요?

“알마티와 서울에서 <고려일보> 창간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기자협회와 만나 내년 100주년 기념행사를 서울에서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고려인 하원 의원, 동포 사회 지도자, 고려인 기업인들이 서울 행사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고려일보와 고려인 동포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1923년 3월1일 창간했다고 들었습니다. 창간 제호는 고려일보가 아니었죠?

“창간 제호는 선봉에 선다는 의미로 ‘선봉’으로 정했습니다. 당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 대부분이 좌익 인사였어요. 원래 1922년에 처음 신문을 찍었어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그 여파가 우리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에게 큰 자극을 주면서 1922년 8월에 3·1운동을 계승한다고 의미로 <3·1 신문>을 발간했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압력 등으로 몇번 나오고 더는 이어가질 못했어요. <3·1 신문>을 주도한 분들이 이듬해 3월1일 <선봉>을 창간했죠.”

―어디에서 처음 신문을 만들었나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했죠. 그런데 일본이 조선은 이미 지구상에서 없어졌다면서 신문을 폐간시키려고 (1922년 12월30일 건국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압력을 넣었고, 고난을 많이 겪었죠. 가장 큰 위기는 1937년 강제이주 전후로 닥쳤습니다. 특히 1930년대 전반기에 소련에서 대대적인 정치적 숙청이 일어나는데 고려인뿐 아니라 모든 소수민족이 그 광풍을 맞습니다. 2500명 정도의 민족 지도자들이 구속되는데, 선봉 편집진도 대부분 잡혀갔습니다. 많은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살아남은 황동훈 선생이 선봉을 찍던 한글 납활자를 보따리에 싸서 중앙아시아로 가져옵니다. 그래서 강제이주 6개월 만에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신문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통역을 도운 김상욱 고려문화원장은 “선봉 창간 당시 책임 주필은 이백초 선생이었고 이성, 오성묵, 이괄, 김진, 최호림, 박동희, 남창원, 황동훈, 김홍집, 윤세환 선생 등이 활약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 소련의 정치적 숙청과 강제이주 과정에서 대부분 투옥됐고,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강제이주로 처음 자리잡은 곳은 어디인가요?

“1937~38년에 강제이주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많은 고려인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레닌기치>로 제호를 바꿔 발행했습니다. 1978년에 다시 알마티로 편집실을 옮겨 지금까지 그곳에서 신문을 내고 있습니다.”

―소련 땅에서 창간했는데 한글로만 인쇄했나요?

“당연히 한글 활자로 신문을 찍었습니다. 최초로 가로쓰기를 했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학자들 이야기를 빌리면 <선봉>은 국외에서 발행한 최초의 한글 가로쓰기 신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한글 지면과 러시아어 지면을 섞어 인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1년까지 모든 면을 한글로 발행했습니다. 그런데 1991년 소련 해체로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고려일보에도 큰 변화가 왔습니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공산주의 건설에 있어 최대의 적은 문맹’이라면서 신문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소련 시절만 해도 소수민족 신문으로 정부 지원을 받았고 윤전기를 돌리는 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정부 지원이 중단됐고, 재정 위기가 닥쳤습니다. 고려인 동포 사회에서 한글을 아는 독자가 계속 감소하면서 일간지로 유지해온 신문을 1993년부터는 격일간으로, 다시 격 3일간으로 바꿨습니다. 결국 1994년부터 현재의 주 1회 발행 체제가 됐습니다. 지금은 매주 한글 4개 면, 러시아어 12개 면, 총 16면을 인쇄합니다.”

김콘스탄틴 <고려일보> 총주필(맨 왼쪽)이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에 있는 신문 편집국에서 기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진석 사진가 제공

한국어·러시아어로 전하는 모국 문화

―고려일보가 현재 고려인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갖고 있나요?

“1923년에 저희 신문이 창간되고 난 뒤부터 고려인 동포들의 항일 독립운동에서 늘 선봉에 섰고, 독립지사들과 함께해왔습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뒤에도 신문 제작을 계속하면서 동포들과 함께했습니다. 소련 해체 이후엔 고려일보가 고려인에게 일종의 정신적 지주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주필로 신문을 만드는 데 있어 무엇에 큰 가치를 두고 있나요?

“한글판 고려일보 제작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는 고려인의 삶입니다. 고려인 동포들의 소식,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옛 소련 지역에 사는 우리 고려 동포들 얘기를 지면에 할애합니다. 모국 문화와 전통을 동포 사회에 전달하는 것에도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또 조국의 통일도 강조합니다. 매호 남북한 소식, 통일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카자흐스탄에서 발행하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동향 등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독자는 카자흐스탄에 한정돼 있나요?

“전체 고려인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소련 시절에는 고려일보 배포 지역이 소련 전역이었지만 소련 해체와 함께 국경선이 생겨 종이신문 배포는 카자흐스탄에서만 이뤄집니다. 하지만 과거 고려일보 기자들이 모스크바(러시아)나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등에서 러시아어로 현지 신문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고려일보에서 만든 기사와 콘텐츠를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 묘역 정비 등을 주도한 것도 고려일보 기자들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1943년만 하더라도 연해주에서 이주한 많은 독립지사가 크즐오르다에 살아 계셨기 때문에 고려일보 기자들 중심으로 홍범도 장군의 추모비를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는 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려인 작가 발굴에도 기여해온 것으로 압니다.

“과거 고려일보는 고려인 동포 문학의 요람 같은 곳이었습니다. 고려인 시인, 작가들이 고려일보 문예면에 작품을 발표했어요. 지금도 스타니슬라브 리 같은 시인이 한글 시를 고려일보에도 발표합니다. 과거보다 양이 줄었지만 문예면을 아직 유지하고 있어요. 더불어 고려극장에 올리는 동포 연극, 연주도 자주 소개합니다. 우리 전통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인민예술가 김 림마 이바노브나의 활동 소식을 꾸준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고려극장은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시기 전 경비책임자인 수위장으로 근무하며 노년을 보낸 곳이다.

“한국-고려인 교량 역할 하겠다”

―현재 고려인은 얼마나 되나요?

“카자흐스탄에는 1만8천여명, 옛 소련 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고려인 동포들이 50만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동포 사회의 당면 과제는 바로 민족 정체성 위기입니다. 모국어 상실로 정체성이 점점 약화하고 있습니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고요. 세대가 지날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각해질 수 있어 고려일보도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모국인 한국이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고 전통문화와 언어를 보존하는 노력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100주년을 맞는 고려일보가 더 발전해 나가야 할 텐데 무엇이 필요한가요?

“고려일보가 종이신문이지만 전체 고려인 동포 사회를 포괄하는 포털 같은 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국과 고려인 동포 사이에 교량 역할을 강화하는 게 저희 목표입니다. 지금 태어나는 어린 세대 고려인과 모국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연결해주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이런 것을 해나가는 과정에 모국도 함께하고, 도움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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