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축구 중심에 뛰어들 수 있다는 자신감 얻은 월드컵
(시사저널=김경무 스포츠서울 전문기자)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보며, 죽기 전에 대한민국이 월드컵 결승에서 뛰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월드컵 때 MBC의 현장 해설위원을 맡아 전문가적이고 재미난 해설로 큰 인기를 누렸던 한국 축구의 레전드 안정환이 결승전 이후 드러낸 바람이다. 축구 하나로 한 달 동안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던 카타르월드컵이 지난 12월19일 새벽(한국시간) 리오넬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월드컵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변과 다양한 화제로 세계 축구의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는 대회로 기억될 만하다. 최고의 주인공은 단연 메시였다. '5수' 끝에 조국 아르헨티나를 36년 만의 우승으로 이끈 메시의 월드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는 자신의 생애 첫 월드컵 우승으로 펠레, 마라도나를 넘어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GOAT)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우승 후보 0순위이던 삼바군단 브라질의 탈락은 대이변이었다. 두 개의 스쿼드를 꾸려도 될 정도의 호화 진용을 구축한 브라질이 크로아티아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무너질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또한 2010 남아공월드컵 우승팀 스페인의 조별리그 탈락은 '볼 점유율 우위만으로는 축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줬다.
2014 브라질월드컵 우승팀 독일이 조별리그 1차전에서 일본에 1대2로 역전패를 당하면서 결국 2회 연속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충격은, 이제 축구에도 영원한 강자나 영원한 약자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보여줬다. 4강까지 오른 아프리카 모로코의 돌풍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월드컵 최대의 의미는 그동안 축구의 변방 취급을 받던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팀의 대등한 경쟁력을 꼽을 수 있다.
세계 축구 점차 평준화…자국 선수들의 유럽 리그 진출이 원동력
포르투갈 출신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팀은 2010 남아공월드컵 때의 허정무호 이후 12년 만에 해외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동북아시아의 '양강'을 형성하는 일본도 같은 업적을 달성했다. 호주까지 포함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소속 3개 팀이 월드컵 본선 16강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AFC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1994 미국월드컵 때 16강에 들었고, 2002 한일월드컵과 2010 남아공월드컵 때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16강까지 진출한 바 있다. 하지만 2002년은 개최국 이점이 있었고, 2010년은 조편성 운도 일부 따랐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아니었다. 축구의 양대 산맥인 유럽과 남미의 강호를 만나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등하게 승부를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게 아시아 축구로서는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독일 분데리스가에서 뛰는 선수가 다수 포함된 일본은 '죽음의 E조'에서 독일을 물리친 데 이어 스페인에 2대1로 역전승을 거두고 16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은 16강전에서도 크로아티아를 맞아 1대0으로 앞서는 등 선전했으나, 동점을 허용한 뒤 승부차기에서 1대3으로 져 진한 여운을 남겼다. 한국은 H조에서 우루과이와 0대0으로 비긴 뒤 가나에 2대3으로 졌으나, 포르투갈에 2대1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12년 만의 16강 진출 쾌거를 이뤄냈다. 브라질과의 16강전에서는 조별리그 혈투에 따른 피로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1대4로 졌다. 비록 16강에 오르지 못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가 조별리그 1차전에서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에 2대1 역전승을 거둔 것은 이번 대회 최대 이변으로 기록될 만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번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꺾은 팀이다.
한국과 일본의 이번 월드컵 약진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많은 아시아 선수가 유럽에서 뛰는 것이 이유 중 하나다. 특히 유럽에 기반을 둔 호주·일본·한국 선수가 많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주장을 맡은 선수도 있다. 유럽 팀과의 경기에서 겁먹지 않게 되고, 더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FIFA 기술연구그룹(TSG) 일원으로 이번 월드컵 경기 현장을 누빈 차두리 FC서울 유스강화실장의 진단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실제 한국팀에도 손흥민(토트넘 홋스퍼)를 비롯해 포르투갈과의 경기 후반 추가시간 1분 결승골의 주인공이었던 황희찬(울버햄튼)과 이재성(마인츠), 황인범(올림피아코스), 이강인(레알 마요르카), 김민재(나폴리) 등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나 독일 분데스리가, 그리스 1부 리그, 스페인 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등에서 뛰고 있다.
"폭넓은 유럽 진출과 함께 세계 축구 흐름 읽는 감독 선임도 중요"
그러나 가나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헤더로 2골을 폭발시키며 벤투호의 기를 살려준 조규성(전북 현대), 그리고 좌우 풀백으로 출격해 선전한 김진수(전북 현대)와 김문환(전북 현대) 등은 K리거다. 특히 2022 시즌 K리그 득점왕(17골) 조규성은 해외에 이적하지 않은 선수도 국내 리그를 통해 잘 단련되면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번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3전 전승을 거둔 팀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도 세계 축구의 평준화 양상을 시사해 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축구의 세계에 비밀이 없어졌다"고 했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더는 강팀도 약팀도 없다.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대륙에서 16강에 올랐다"고 말했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등 세계 무대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축구문화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 프로축구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한 인사의 지적은 그래서 되새겨볼 만하다.
"유럽이나 남미 사람들은 축구가 생활이요, 삶의 일부이자 신앙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성지 순례하듯 이들은 월드컵 경기장을 찾아 열띤 응원을 했다. 축구 애정이 강력하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월드컵 때만 애국적 차원에서 관전을 하고 응원한다. 끝나도 프로축구 경기장 같은 데는 가지 않는다. 축구문화 차원에서도 아직 멀었다. 선수들의 경기력 간격은 세계 정상과 좁아지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는 "축구를 생각하는 자세, 축구의 사회적 위상이나 영향력 측면에서 한국은 유럽 등에 견줄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런 것이 이뤄질 때 진정한 축구 강국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문성 해설위원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기술적 깊이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다시 드러났다. 또한 유럽 리그도 큰 데만 고집하지 말고, 포르투갈이나 다른 곳으로도 폭넓게 진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읽는 지도자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는 것도 중요하다. 외국인이든 국내 지도자든 관계없다. 그러나 국내 풀이 좀 부족한 것은 엄연한 현실"이라고 했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때만 광풍에 빠지는 국내 축구문화의 냄비 근성은 늘 지적되는 사항이다. 국가대표 경기만 고집하지 말고 K리그 중흥이 이뤄지도록 꾸준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가 이제 더 이상 세계의 변방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점은 최대의 성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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