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헌신’ 광주 해동건설 박형선 회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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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시대의 풍운아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24일 새벽 1시54분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광주 서중·일고를 졸업한 박 회장은 1972년 전남대에 입학해 '민족사연구회'에 가입한 뒤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전남대 3학년 재학 시절인 1978년 12월엔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운동을 하던 여동생 박기순이 함께 살던 집에서 1978년 12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는 아픔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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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시대의 풍운아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24일 새벽 1시54분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광주 서중·일고를 졸업한 박 회장은 1972년 전남대에 입학해 ‘민족사연구회’에 가입한 뒤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1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1976년엔 윤한봉(1948~2007)의 권유로 고향으로 내려가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고인은 그해 11월 함평군 단위농협이 전년보다 비싼 값에 고구마를 전량 수매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자 농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함평고구마 투쟁에 지역 농민운동가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남대 3학년 재학 시절인 1978년 12월엔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운동을 하던 여동생 박기순이 함께 살던 집에서 1978년 12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는 아픔도 겪었다. 1982년 2월 박기순과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1950~1980)의 영혼결혼식을 계기로 만들어진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박 회장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 당시 예비검속으로 체포돼 상무대 군 영창에 수감됐던 5·18유공자다. 형은 <한겨레> 기자를 지낸 박화강 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이다. 부인 윤경자씨는 ‘5·18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의 여동생이다.
1970년대 후반 고교 동문과 함께 보성건설을 창업했던 박 회장은 이후 사업가의 길로 나섰다. 이후 민청학련 동지들의 소개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정치인 노무현과도 인연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박 회장은 2002년 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적으로 도와 ‘광주 노풍의 주역’이란 평가를 듣기도 했다.
시련도 겪었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대출비리 사건에 연루돼 불법 금융거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된 것이다. 하지만 2013년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에서 불법 대출 혐의 등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경자씨와 아들 찬(해동건설 대표), 지웅씨 등이 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광주 천지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26일 오전 9시40분, 장지는 국립5·18민주묘지다. (062)527-1000.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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