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죽자 벌인 '미친 짓'…유럽 뒤흔든 '막장 드라마'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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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가 '맏며느리' 후아나
이 그림을 보시죠. 바람 부는 춥고 황량한 들판에 대규모 장례 행렬이 멈춰 서 있습니다. 검은 칠을 한 관에는 합스부르크 집안의 상징인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관 주인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높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옆에는 상복을 입은 여성이 관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딘가 기이한 느낌을 줍니다. 차렷 자세를 하듯 굳어 있는 몸도 그렇거니와, 표정이 사라진 얼굴 속에서는 커다란 눈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네요. 그만큼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유족이 이렇게 비통해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전혀 슬프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지겹다’는 표정을 한 사람들, ‘멍때리는’ 듯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예 눈을 감고 있거나,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네요.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사실 너무한 건 검은 옷을 입은 여성, 카스티야(지금의 스페인 중부)의 여왕인 후아나였습니다. 관 속에 누워있는 건 죽은 남편 펠리페 1세. 그가 이 관에 들어간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후아나는 관을 매장하지 않고 정처 없이 몇 날 며칠동안 스페인의 들판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들판에서 미사를 드리고 관을 열어 남편의 얼굴을 확인했죠.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아마도 후아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펠리페는 죽지 않았어. 잠든 것뿐이야. 혹시 죽었더라도 다시 살아날 거야. 관을 열면 그이가 많이 놀랐냐며, 다 장난이었다며 빙긋 웃을지도 몰라. 지금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하지만 동행하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었겠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후아나 여왕의 ‘미친 사랑’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후아나 공주, 백마 탄 왕자를 만나다
후아나가 태어난 1479년만 해도 스페인의 모습은 지금과 꽤 달랐습니다. 이베리아반도 아래쪽 일부는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고(그라나다), 지금의 스페인 땅은 크게 두 나라로 갈라져 있었죠. 스페인 중부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동부에 있는 ‘아라곤 연합 왕국’이었습니다.
후아나의 부모는 그야말로 대단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아버지(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의 왕이었고, 어머니(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의 여왕이었습니다. 스페인은 이 둘의 ‘세기의 결혼’(1469)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1492년 이베리아반도 남부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781년에 걸친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을 마무리했습니다. 나라를 통일시키고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서 현재 스페인의 틀을 만든 주인공이 바로 이 부부인 거죠.
다만 부부 사이가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잡은 게 아니라 두 명이 ‘공동 왕’이 되는 식의 통일이어서, 서로 견제가 끊이지 않았거든요. 이때는 남존여비 시대였으니 둘의 힘이 비슷하다면야 남편이 주도권을 잡았을 겁니다. 하지만 국력으로 보든 영토로 보든 아내의 나라가 남편 나라보다 3~4배는 더 강했습니다. ‘남자 체면’을 살리고 싶던 남편은 호시탐탐 아내의 나라를 손에 넣을 기회를 넘봤고, 아내는 “나이도 내가 한 살 누나인 거 알지? 어림도 없다”며 코웃음 쳤죠.
똑똑하고 섬세한 소녀였던 후아나는 이런 집안 분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했을 겁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요즘으로 치면 TV에 나올 정도의 ‘금쪽이’였다고 합니다. 공부도 곧잘 하고 교양도 있었지만, 가끔 심각하게 부모에게 반항했다고 하네요.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습니다. 후아나는 전체 자식 중에서는 셋째, 딸 중에서는 둘째였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메인 디쉬’는 아니었죠.
후아나가 16세 되던 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남 펠리페 1세가 결혼 상대로 정해집니다. 너무 잘생겨서 별명이 ‘미남왕’(Philip the Handsome)이었습니다. 그림만 보면 납득하기가 어려운데요. 당시에는 미적 기준이 지금과 달랐거나, 실제로 보면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아무튼 집안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남자와 결혼한다니 후아나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습니다.
1496년 결혼식을 위해 펠리페의 영지에 발을 내디딘 후아나.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그녀 앞에 웬 미남이 나타납니다. 예고도 없이 마중 나온 18세의 예비 신랑이었습니다. 피 끓는 나이, 둘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첫날밤을 치러 양가 부모님들을 황당하게 만듭니다. “에휴…. 뭐 금슬은 좋겠구만.” 어쨌거나 결혼식은 예정대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질투, 집착, 실성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남편에 대한 후아나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펠리페는 곧 후아나에게 질려버리고 맙니다. 사실 그는 몹시 나쁜 남자였고,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거든요. 상대를 홀딱 반하게 만드는 ‘말발’을 비롯해 이성을 다루는 갖가지 기술도 수없이 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익힌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럽에서 손꼽히게 풍요로운 ‘부자 지역’(부르고뉴)에 살던 그에게 척박한 스페인은 너무나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장녀에 이어 후계자인 아들까지 나오자 펠리페는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돕니다. ‘너한테 질렸다’는 티도 팍팍 냈죠. 후아나의 집착은 더 깊어졌고, 혼신의 힘을 다해 남편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그럴수록 펠리페는 지긋지긋하다고 여겼습니다.
후아나의 히스테리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아내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펠리페가 임신 중인 후아나를 스페인에 놔두고 영지로 돌아간 적도 있었는데, 출산하자마자 쫓아간 후아나가 궁정에서 펠리페의 애인을 발견하고 가위로 머리를 다 잘라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펠리페는 후아나의 뺨을 때렸죠. 남편과 배를 탈 때는 “나 말고 여자가 한 명이라도 탄 배는 절대 안 된다”며 생떼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아침 TV에 틀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막장입니다. 스페인 궁정에는 “후아나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집니다.
그러던 중 후아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스페인판 ‘사랑과 전쟁’은 ‘재벌집 막내아들’ 같은 장르의 드라마로 바뀝니다. 사실 후아나와 펠리페가 지지고 볶는 사이 스페인 궁정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왕위 계승권자인 오빠와 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이에 따라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국의 1순위 후계자가 됐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당연히 후아나가 다음 여왕이 돼야 하는데, 아버지는 이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죠. “아내에게 기죽어 살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내가 스페인의 왕이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후아나의 계승권을 빼앗아 오기 위해 아버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죽자마자 50대의 나이에 어린 후처를 얻은 것도 왕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을 새로 낳아서 통일 왕국을 물려주려 했던 거죠. 후아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요.
펠리페의 행동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긋지긋한 아내와 참고 살았던 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며 헐레벌떡 영지에서 스페인으로 간 거죠. 아버지와 남편은 후아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할 사람들인데, 정작 이들은 후아나를 ‘왕관을 얻을 도구’로만 여겼던 겁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와 남편은 스페인의 주도권을 놓고 거하게 한 판 붙을 상황에 놓였습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가족 전체가 비호감 덩어리였죠. 후아나는 미쳤고, 아버지도 권력에 미쳐 딸을 버린 비정한 사람, 펠리페는 두말할 것 없는 인간쓰레기라는 게 당시 인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카스티야 왕위를 물려받아야 합니다. 여러 현실적인 역학관계를 따져봤을 때 아라곤을 갖고 있는 아버지에게 권력을 몰아주기보다는 펠리페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것이 낫다는 게 당시 지배층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장인과 사위의 어색한 공동 통치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건강하던 펠리페가 급사합니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장티푸스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장인이 독살한 게 틀림없다’며 수군댔습니다. 뱃속에 여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후아나는 안타깝게도 ‘정신줄’을 놔 버립니다. 펠리페는 분명 최악의 남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후아나는 그를 목숨보다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기사 첫 부분에 나온 후아나의 ‘미친 짓’도 그 때문입니다. 남편의 시신과 함께 떠돌아다닌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불과 1주일 정도라는 의견도 있지만, 반년 이상이라는 얘기도 있죠.
다시 실권을 잡은 후아나의 아버지. 미쳤다는 이유로 29세의 후아나를 그녀의 막내딸과 함께 궁전에 유폐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스페인을 홀로 통치해 나갑니다. 이 유폐는 후아나가 7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비극적인, 그래서 예술적인
“지극히 에스파냐적인 동시에 지극히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후아나를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의 가장 처음 부분 그림을 그린 프란시스코 프라디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짝사랑, 열정, 실연, 광기, 질투 등 이 얘기에 포함된 여러 요소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가 그림과 소설, 오페라와 연극 등으로 후아나의 이야기를 묘사했죠.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다섯 번이나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후아나의 이런 이미지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후아나의 왕관을 노렸던 남편과 아버지가 한마음 한뜻으로 “후아나는 미쳤으니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런 정치적 선전이 상식처럼 굳어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후아나의 삶은 더더욱 불쌍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내 돈과 권력을 빼앗는 데 혈안이 돼서, 내가 미쳤다는 소문을 동네방네 퍼뜨리고 다니며 피 터지게 싸우는 꼴이라니….
한편으로는 후아나가 일부러 ‘미친 척’을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펠리페가 죽었을 때 후아나의 나이는 20대에 불과했습니다. 젊은 홀몸의 강대국 여왕이니, 결혼하려는 다른 나라 왕족들이 줄을 설 수밖에 없죠. 새로 결혼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나오면 또 집안에는 피를 튀기는 권력 투쟁이 벌어질 겁니다. 펠리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의 권리를 지키려면 결혼할 마음을 접게 만들어야겠죠. 펠리페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미친 척을 했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사랑하는 펠리페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 카를 5세는 훗날 ‘세계의 왕’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스페인을 비롯해 플랑드르 지방과 중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 이탈리아, 새로 개척한 식민지인 아메리카 대륙·필리핀까지가 모두 카를 5세의 영토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유폐 생활을 겪은 후아나는, 정말로 미쳐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이전부터 미쳐 있었든, 누명을 썼든, 일부러 미친 척을 했든지 말이죠. 그만큼 후아나에게 세상은 가혹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죽을 때까지 유폐 생활을 하다 쓸쓸한 죽음을 맞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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