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몸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시절이 어려워도 온천은 식지 않아
코로나로 문 닫은 목욕탕 대신
지하철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전국 물 좋은 온천 찾아 삼만리
☞한겨레S 뉴스레터 무료 구독.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진주엔 이상하게 목욕탕이 많았다. 우리 앞집이 동화탕이라는 목욕탕이었고, 나랑 제일 친했던 도원이네도 도원탕이라는 목욕탕을 했다. 동향인 아내의 집 맞은편에는 옥수탕이 있었고, 그 골목 뒤에는 수정탕이 있었다
겨울에 피는 꽃 동화탕. 무릉도원이 생각나는 도원탕. 물이 옥같이 부드러운 옥수탕. 수정같이 물이 맑은 수정탕. 예쁜 이름들을 가진 이 오래된 목욕탕들은 코로나를 겪으면서 하나같이 힘들어졌다. 뜨끈한 탕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땀방울을 닦아내는 것이 목욕의 재미인데, 코로나19는 그 상황을 아주 위험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지방 소도시의 작은 목욕탕부터 내가 사는 성남의 동네 목욕탕까지, 몇 년 사이 사라진 목욕탕이 많다. 코로나로 힘들어진 자영업이 어디 목욕업뿐이겠냐 만은 쓸쓸하고 슬픈 일이다. 어른은 어른대로 사정이 안타까웠고, 아이는 아이대로 찜질방에 앉아서 먹는 식혜와 구운 계란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목욕탕과 멀어진 채 지내던 어느 주말, 집에서 뭘 하고 보낼까 고민하던 때 아내가 가족탕이나 노천탕을 가 보는 건 어떠냐는 얘기를 꺼냈다. 트렁크에 목욕 바구니와 갈아입을 속옷을 넣고, 집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목욕을 하러 가는 일. 하나도 일상적이지 않은 온천 투어가 작년과 재작년 우리 가족이 꽤 자주 나선 주말 외출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온천으로
우리 가족이 모두 가장 사랑했던 온천은 충북 충주 수안보면에 있는 한화리조트 온천이다. 수안보는 우선 온천 마을 자체가 아주 묘한 느낌을 주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오래된 온천 마을 같다. 약 20년 전쯤에서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느낌. 커다란 주차장과 유행이 한참 지난 화려한 거리 장식물. 그 녹슨 장식물 사이로 온천의 김이 모락모락 온 마을을 뒤덮는다. 대략 열 군데가 넘는 수안보 온천탕 중에 한화리조트 수안보 온천의 노천탕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천탕이라고 부를 만 했다. 큰 호박돌 사이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솟게 디자인했고, 돌 사이엔 창포를 심어두었다. 용천수 자체가 워낙에 뜨거우니까 땅이 얼지 않아 겨울에도 창포 꽃이 피었는데 한겨울 눈이 싸락싸락 내릴 때 뜨거운 온천에 앉아 눈을 맞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낮엔 사람이 많아서 우리는 주로 저녁 시간에 맞춰 온천에 갔는데, 어쩌다 아무도 없이 우리 가족만 탕에 들어와 있으면 아이들은 노천탕 벽 넘어 여탕에 혼자 있는 엄마와 수다를 떨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이 온천은 너무 시설이 낡았다고 생각했는지 호텔처럼 반듯한 사각 돌을 깐 모던한 디자인으로 바꾸었는데, 정취는 사라졌지만 물 자체가 워낙 좋아서 우리는 한 달 목욕권을 끊어서 주말마다 다녔다. 그런데 그 목욕탕을 지금은 갈 수가 없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목욕탕처럼 대기업이 하는 이 온천도 지난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잠정 휴업에 들어갔다.
한화리조트 수안보 온천이 문을 닫은 뒤 우리는 여기저기를 찾아 헤맸다. 어떤 곳은 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 어떤 곳은 사람이 너무 많아 발길을 끊었다. 그런 가운데 강원도 속초의 척산 온천은 두 가지 이유로 우리 가족을 기쁘게 했다. 하나는 속초의 바다와 설악산. 척산온천은 설악산의 자락에 있다. 척산온천에서 설악산 신흥사나 케이블카를 다녀와도 좋고, 한겨울의 속초 해수욕장을 걷다 와도 좋았다. 아이들은 볼이 빨개질 때까지 추운 눈밭을 뛰어다니다가 온천의 뜨거운 물로 뛰어들곤 했다. 열정과 냉정 사이가 아니라 온탕과 냉탕 사이, 그 개운함이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는 ‘가족탕.’ 척산온천은 커다란 대중탕과 함께 가족들이 함께 쓸 수 있는 가족탕을 운영하는데, 일반적인 숙소에서 ‘탕’이 특화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도 쓰지 않은 깨끗한 온천물을 탕에 받아놓고 탕을 이용할 순서를 정한다. 아이들이 탕에서 노는 동안 정리를 하고 속초 중앙시장에서 사 온 닭강정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 만큼 물놀이를 하고, 닭강정을 먹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잠든다. 그때부터는 아빠의 시간. 대중탕을 다닐 때, 큰 애 씻기고, 작은 애 씻기고 나면 정작 나는 때를 밀 시간이 모자랐는데, 가족탕을 다니면서 비로소 양껏 때를 밀 여유가 생겼다. 커다란 탕에 혼자 앉아 뜨거움을 만끽하고 때를 밀고 나면, 한 주의 스트레스도 천천히 밀려 나갔다. 돌아오는 길만 멀지 않으면 매주라도 올 텐데…. 척산온천에 방문할 때마다 속으로 하는 생각이었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을 타고 갈 수 있는 충남 아산 온양 온천은 가성비 측면에서 극강의 온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하철에 목욕 바구니가 어울리나 싶어서 우리는 차를 타고 이용하지만, 서울의 어르신들이 주중 한산한 시간, 친구들과 긴 여행을 즐기는 코스로 알려져 있다. 온양 온천은 삼국시대 때부터 온천이 솟아서 조선 시대 때는 왕들이 행궁을 차리고 이용했던 왕들의 온천이다. 그런 만큼 온천물 자체도 매우 좋은데, 학이 온천물에 다리를 낫게 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이용했다는 이야기, 사도세자가 온천을 방문할 때 수행원이 천 명이 넘어서 마을 사람들이 싫어했었다는 설 등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많이 숨겨져 있는 온천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곳을 이용할 때는 올라오는 길에 천안에 들러 순댓국을 먹고 오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몸도 마음도 뜨끈해지는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시절이 어려워도 온천은 식지 않으니까
코로나19는 많은 걸 바꾸어 놓았다. 아빠가 애들 등을 밀면서 등을 때리는 모습, 목욕탕에서 뛰지 말라며 호통치는 어른들의 모습, 목욕 후에 마시는 개운한 바나나우유. 코로나19가 한창일 땐 이제 이런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라고 온천물이 차가워지지 않는 것처럼 여러 온천은 가족탕을 만들고, 시설을 고치며 이 시대에 적응하고 있다. 추운 겨울 주말 몸이 찌뿌둥한 한 주를 씻어내듯 트렁크에 목욕 바구니를 싣고 온천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가서 씻을 거니까 머리도 감지 말고, 옷도 대충 입고. 온천에 몸을 담그고 탕 밖을 나서면 몸에 켜켜이 묵은 한 주의 때가 사라진 개운함이 기다린다. 생각만 하지 말고 지금 인터넷을 열어 온천을 찾아보자. 찾아보면 멀지 않은 곳에 따뜻한 온천이 기다리고 있다.
온천 어디까지 가봤니? 전국 온천 여행
대전 유성 온천: 온천은 1970년대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많았는데, 유성 온천도 그런 온천 타운의 전형을 갖고 있다. 주변에 먹을거리·놀거리가 풍부하며 시내 한 가운데 있어 부산의 동래 온천과 함께 접근성이 아주 좋다. 큰 대중탕 위주로 온천이 형성되어 있는데, 가족 여행객은 작은 모텔에 딸린 온천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인제 필례 온천: 필례 온천은 이름도 특이하지만, 온천 자체도 좀 특별하다. 대부분 국내 온천이 주로 옛스러운 모습을 갖고 있는데 반해 필례 온천은 속된 말로 ‘인스타각’이 나오는 모던한 온천이다. 다녀온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천탕 올타임 국내 넘버원”. 보통의 온천은 온천의 특성상 프라이버시를 위해 담이 높게 쳐져있는데, 이 곳은 노천탕을 즐기면서 주변을 볼 수 있도록 뻥뚫린 창을 내 놓았다. 한마디로 눈 내린 산들을 바라보며 호젓이 온천을 즐기는 신선 놀음을 할 수 있다는 얘기.
포천 일동 유황 온천: 경기도 포천 이동갈비를 먹고 온천에서 때를 미는 일정이 딱 떨어지는 코스다. 물 자체가 전국에 이름난 온천만큼 특별히 좋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일반 목욕탕보다 보들보들한 느낌이 드는 좋은 물이다. 혹시 아이와 함께 온천 코스를 짜는 분이라면 온천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한탄강 주상 절리길도 좋다. 한탄강의 강물이 만든 주상절리 절벽 한 가운데를 3.6㎞ 철망으로 놓은 절벽길을 걷는 나름 스릴 넘치는 코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절벽 사이를 1시간 동안 걷고 나서, 우리집 큰 애는 다시는 안 간다며 소리를 질렀고, 작은 애는 그것도 못 걷냐며 형을 놀려대는 재미있는 길이었다.
거창 가조 온천: 지리산 자락에 숨겨진 온천이다. 이곳은 큰 대중탕 위주로 만들어져 있어서 본문에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이 온천의 특색은 워터파크를 무색캐하는 광활한 냉탕이다. 냉탕 자체가 야외에 있어서 여름에 특히 좋은데, 방문하면 수많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온 몸으로 물을 즐기는 희한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밖에서 저대로 놀고, 어른들은 탕에서 때를 미는데 집중할 수 있다.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내년 예산 638조7천억…노인일자리 6만개 확대, 종부세는 무력화
- “모든 삶은 기록되어 마땅하다” 죽음 마중하는 서른명의 자서전
- [논썰] 짜고 치는 이태원 망언, 대반전 노리는 혐오 정치
-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 일본 15년이나 허탕…체포되지 않은 ‘조선의 거물’ 있었다
- 눈폭탄에 카페 지붕도 ‘폭삭’…최대 87㎝ 눈 제주선 수백편 결항
- 전 용산서장·전 상황실장 구속…참사 책임자 ‘윗선’ 수사 탄력
- 15년 남은 이명박 사면, 김경수 ‘복권 없는 형 면제’ 가닥
- [단독] 한·일 기업 돈으로 강제동원 배상…정부 뜻 밀어붙이나
- ‘이불’ 쓰고 나왔다…체감 영하 59도 미국 “생명 위협하는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