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 영화와 현대미술의 공통점은?…‘비가시 영역’ 드러내는 난해한 작업
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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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데이의 이태원 참사가 있고 나서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몇 년 전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수백의 어린 목숨을 허망하게 앗아갔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참사 당시 이태원 골목길 영상과 전문가들의 원인 진단은 그 순간 그들의 공포와 고통, 그리고 남은 자들이 느끼는 이 먹먹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도대체 이런 참사의 경험을 재현하고 전달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전쟁이 지속되고, 우리는 그 전쟁의 영상과 사진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것들은 영화의 전쟁 장면처럼 호기심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소비될 뿐이다. 저편의 풍경으로 제시되는 전쟁 이미지로는 전쟁의 참상을 보는 이에게 자신의 문제로 느끼게 할 수 없음에 따라, 그 참혹함을 폭로하거나 고발할 수도 없다.
얼마 전 작고한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가 그리는 전쟁은 비장하거나 장엄하지 않다. 군인이 아닌 일상의 인물들이 총을 들고 허둥대며 달아나거나 어설프게 총을 겨눠 쏘고, 어쩌다 그 총에 맞아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예기치 않은 순간 마을 한쪽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탱크가 등장하고, 정말 대포를 쏴서 촬영세트를 파괴하거나 사람을 죽인다. 그의 전쟁은 비극이기보다 오히려 희극에 가깝고, 그 어설픔 가운데 관객은 실제 전쟁에서 총을 들고 생사의 갈림길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 어처구니없음을 몸소 깨닫는다.
고다르의 혁명적 실험
비슷한 시기 체코 출신의 미디어아티스트이자 이론가인 하룬 파로키는 베트남전에 사용된 네이팜탄의 사용을 규탄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작업 <꺼지지 않는 불꽃>(1969)에서 담뱃불은 400도이고 네이팜탄은 3천도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자신의 팔을 담뱃불로 지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담뱃불 열기의 몇 배라는 방식으로 그 고통의 강도를 상상하면서, 관객은 네이팜탄의 무차별적 투하가 얼마나 비인간적 행위인지 가까스로 짐작할 수 있다.
고다르는 영화를 통한 혁명을 꿈꿨고, 그 일은 곧 영화를 혁명하는 일로 귀결됐다. 보통의 극영화는 이야기를 따라 화면에 몰입하게 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이야기는 종종 단절되거나 어긋나고, 이미지와 소리도 논리적으로 배열되지 않는다.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고 미궁에 빠져버린 관객은 이내 스스로 해석에 개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미지와 사운드의 이 벌어진 틈새에서 예기치 못한 것을 발견한다. 난해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란 이처럼 결코 쉽지 않은 우연하고 예기치 않은 만남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평생에 걸친 고다르의 실험은 증언한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영화의 역사는 고다르 이전의 고전 극영화 시대, 그리고 고다르 이후의 나머지 절반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영화의 시대는 서구의 백인, 중산층에 속하는 양성애자 남성의 시점으로 모든 사태가 가지런히 질서 지워진 세계였다. 고다르가 영화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할 무렵, 근대라는 한 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가 도래하면서 근대의 질서에서는 존재하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비서구의 유색인, 여성, 퀴어 같은 성소수자,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삶과 주장이 비로소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그간 우리 사회에서 기피 대상으로 은폐됐던 자폐장애인, 나아가 장애인 일반의 삶을 대중에게 보여줬고, 베일에 싸였던 ‘김앤장’과 ‘태평양’으로 대변되는 국내 대형 로펌의 존재를 ‘태산’과 ‘한바다’라는 이름으로 수면 위에 드러냈다. 그리고 잇따라 방영된 <천원짜리 변호사>는 바로 그 대형 로펌과 정·재계 고위층 및 검찰의 어두운 유착관계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자폐장애인이나 장애인 일반, 그리고 극소수 대형 로펌과 권력의 검은 유착은 사실상 비가시의 영역이다. 대중은 불편한 진실을 굳이 알려 하지 않고, 어느 사회든 지배권력은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한 부수적인 필요악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들 드라마는 이런 진실을 허구적 방식으로 보여주며, 비가시 영역을 가시화하는 이런 작업은 근대 이후 예술이 떠안은 역할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작가 임민욱의 <뉴타운 고스트>는 서울 도심의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철거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임흥순의 <위로공단>은 ‘구로공단’의 10대 여성들부터,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여성노동, 그리고 아시아의 여성노동자까지 젊은 여성들의 노동현장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업 형식은 다큐멘터리도 극영화도 아니다. 임민욱의 작업은 재개발 현장을 젊은 소녀가 픽업트럭을 타고 돌면서 준비된 대사를 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돌아갈 곳 없는 나는 뉴타운 고스트”라고. 임흥순의 작업은 인터뷰 위주의 영상인데 이야기 사이에 노동과는 무관한 이미지들을 삽입해서 사유의 틈새를 마련한다.
근대 이후 예술의 역할
이처럼 단지 억압되거나 가려져서 보지 못한 영역 외에, 도대체 재현 자체가 불가능한 사태와 사물, 인간의 눈이나 카메라, 그리고 언어의 해상도로는 담을 수 없는 그 내밀한 세부와 강도의 거대한 비가시 영역이 존재한다. 고다르가 평생 100여 편의 작업에서 매번 새로운 형식을 실험해야 했듯이 이런 불가능의 영역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고, 그 작업에 접근해 이해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그 파편들을 머릿속에서 이어 붙이면 의외의 발견이라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좋은 현대미술 감상이 꼭 고다르 영화 보기와 같다. 현대미술은 논리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인식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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