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만 쏘는 게 아니다…북한의 ‘핵+경제’ 병진노선 2.0
핵심은 먹고살기 위한 경제성
핵으로 ‘국방 가성비’ 높일 심산
경제 변화도 냉철하게 평가해야
[한겨레S] 정욱식의 찐 안보
김정은의 ‘선경정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서구 국가들이 재래식 무기로 그들(유럽에서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바르샤바조약기구―필자 주)과 같은 수준에 다다르려 했다면, 아마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을 철회하고 영구적 전시 상태에 놓인 전체주의 국가가 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자유주의를 구원한 것은 핵무기였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핵무력을 ‘국체’로 삼기로 한 그의 결심은 이 구절과 너무나도 닮은꼴이다. 아마도 김 위원장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구원하는 것은 핵무력이다”라고 믿으면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듯싶다.
‘가성비’에 초점 맞춘 군사전략
병진노선은 2013년 이래 김정은 정권의 핵심적인 전략이다. 북한은 2018~2019년 남북·북미 정상회담 시기에 이 노선을 잠시 접었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되자 “경제발전에 유리한 대외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기대하고는 2018년 4월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병진노선의 종결을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기대했던 제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2021년 1월 당대회를 통해 ‘병진노선 2.0’을 선택했다. 북한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렇게 부를 수 있다. 또다시 핵무력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제재를 ‘상수’로 간주하곤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통해 경제발전도 이루겠다는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색안경을 벗고 보면 북한의 이러한 선택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병진노선의 핵심에는 ‘안보의 경제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재래식 군비의 비중은 줄이면서 핵전력을 대폭 증강해 이를 상쇄하려고 했던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New Look), 이것을 모방한 소련 흐루쇼프, ‘양탄일성’(원자탄·수소탄과 인공위성)을 조속히 완성해 경제발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중국의 덩샤오핑 등과 흡사한 논리 구조를 갖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비밀 핵개발을 시도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병진노선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핵무장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없다”는 주관적 확신이나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김정은 정권은 핵무장에만 매달린다”는 도덕적 비난에 갇힐수록 달라지는 북한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오히려 병진노선이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거나 앞으로 그럴 잠재력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념상 이러한 진단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북한이 한정된 자원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투입하면 경제발전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힘들어진다. 또 핵개발은 강력한 경제제재를 초래해 대외교역의 위축을 동반하고 국제금융체제로의 편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통념을 재평가해야 할 사유도 있다. 병진노선이 품고 있는 세 가지 측면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는 가성비에 따른 ‘예산 조정’이다. 병진노선은 핵무력 증강과 재래식 군비 절감을 핵심 기조로 삼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2013년 3월31일에 병진노선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병진노선의 참다운 우월성은 국방비를 추가적으로 늘리지 않고도 전쟁억제력과 방위력의 효과를 결정적으로 높임으로써 경제건설과 인민 생활 향상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2013년 이래 북한의 국방예산은 정부 전체 예산 대비 15.8%에서 16% 사이를 오가고 있다. 반면에 경제와 농업 등 인민생활, 그리고 과학기술 예산은 점차 높아져왔다. 경제건설 예산의 추이를 보면 2013년부터 코로나19 발생 전까지는 매년 4.9~6.2%씩 늘어났다. 이 분야 예산이 2021년에는 0.6%, 2022년에는 2% 증액에 그쳤는데, 이는 북한이 2021년에 코로나 대응 예산을 신설하고 2022년에는 33.3%나 늘린 데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군민융합’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중국의 군민융합발전위원회에 따르면, 군수공장의 민수용 제품 생산은 1978년 8.1%에서 1993년에는 77.4%로 크게 늘어났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양탄일성’을 서둘러 완성하고는 인민해방군 및 군수공장에 민수용 사업의 비중을 크게 늘리라고 지시했다. 김정은 역시 2019년 신년사를 통해 군수공업 부문에서 “경제건설을 적극 지원할 것”을 지시했다. 일례로 2022년 9월25일에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5500여대의 농기계 전달 행사가 열렸는데, 이들 기계 생산·제작을 군수공업 부문이 맡았다.
셋째는 군사 분야의 민수 전환이다. 소련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1988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약 400개 군수산업체를 민수용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군부 및 군수산업체 관계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이는 소련 몰락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김정은 정권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군부에 대한 장악력을 확고히 하고 군부와 군수산업을 경제건설의 역군으로 치켜세우면서 군부의 자부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선군정치에서 선경정치로
북한의 전환은 인력과 산업, 그리고 토지 이용에서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북한은 2021년 1월, 5개년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면서 북한군 사병의 복무기간을 남성은 기존 8~9년에서 7년으로, 여성은 6~7년에서 5년으로 줄인 것으로 파악됐다. 국정원은 경제건설에 젊은 노동력 투입을 확대하고 군 정예화를 도모하기 위한 조처로 풀이했다. 토지 및 산업 분야에선 대규모 공군기지를 민수용으로 전환한 것이 확인되었다. 북한은 2020년에 함경북도 경성군에 있던 군 비행장을 ‘중평남새(채소)온실농장’으로, 2022년에는 함경남도 함주군에 있던 군 비행장을 ‘연포온실농장’으로 전환했다.
물론 이러한 부분적인 변화만으로 북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병진노선은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에서 김정은 시대에는 ‘선경정치’로의 전환을 꾀하겠다는 전략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에선 북핵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북한이 미사일만 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언론에선 잘 보도하고 있지 않지만, 경제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 북한의 병진노선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시급하다고 보는 이유이다.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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