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도 눈 덮인 광화문 거리를 찾아갑니다, 이 노래와 함께
특정한 계절이나 시기를 노래한 곡을 흔히 시즌송이라 한다. 겨울 시즌송도 다른 계절 못지않다. 팝이나 캐럴까지 보면 너무 많으니까 가요만 봐도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 어반자카파의 ‘코끝에 겨울’, 임재범과 테이가 함께 부른 ‘겨울이 오면’ 등등 제목부터 겨울이 들어간 노래들이 여럿이다.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정승환의 ‘눈사람’,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처럼 제목에 눈이 들어간 노래도 꽤 있다. 지누의 ‘엉뚱한 상상’, 별의 ‘12월 32일’, 가인과 김용준이 함께 부른 ‘머스트 해브 러브’ 등등 멋진 가사로 겨울을 담아낸 노래들도 좋다. 내가 꼽는 최고의 겨울 노래는 이영훈의 ‘옛사랑’이다. 처음 듣는 제목이라고? 다들 이문세의 ‘옛사랑’이라고 한다. 나는 왠지 이 노래만큼은 가수인 이문세가 아니라 곡을 만든 이영훈의 이름을 붙이고 싶다.
이문세의 히트곡 대부분을 만든 작곡가이자 작사가인 이영훈은 우리 가요사에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다. 교사인 아버지와 의사인 형이 있는 학구적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란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릴 때부터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작곡가로서 그의 선택을 지원해준 어머니와의 일화는 그의 노래만큼이나 슬프다. 1985년 신인 작곡가 이영훈은 이문세를 만나 처음으로 함께 내놓은 결과물인 ‘난 아직 모르잖아요’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그 노래가 두달이 넘도록 가요 순위 1위를 휩쓸던 환희의 겨울, 이영훈의 어머니는 말기 암 환자로 중환자실에 있었다. 사경을 헤매던 중 아들에게 드디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어릴 때 피아노 사준 돈을 갚으라는 농담을 하고 2주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보낸 아들의 마음엔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였을까.
이영훈-이문세 콤비가 거둔 음악적 성취를 이 지면에 다 담는 일은 불가능하다. ‘소녀’, ‘사랑이 지나가면’, ‘가을이 오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광화문 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시를 위한 시’ 등등 히트곡 제목만 다 적기도 벅차다. 발라드 전문 작곡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붉은 노을’, ‘깊은 밤을 날아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같은 노래들은 또 얼마나 가슴 벅차고 씩씩한가. 유려한 멜로디에 딱 붙는 가사도 일품이다.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는 하나의 사물은 가장 적합한 하나의 명사만으로 불러야 한다는 일물일어설을 주장했는데, 이영훈의 노래가 그렇다. 노래와 노랫말이 완벽히 한 몸이다.
워낙 아름다운 가사를 많이 썼던 그였기에 생전에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랫말이 뭐냐는 질문을 여러번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주저 없이 ‘옛사랑’을 꼽았다. 이 노래는 바로 이문세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마음속 깊이 숨겨둔 과거의 영상이 절로 재생된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둘 중 하나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거나 첫사랑을 지금껏 지켜오고 있거나. 아무튼, 옛사랑의 기억에 취해 거리를 배회하던 남자는 계속 노래한다.
‘흰 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내가 이 노래를 최고의 겨울 노래로 꼽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영훈은 하얀 눈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지 않고 자꾸 올라간다고 했다. 눈 내리는 거리를 멍하니 보다 보면 정말 그렇다. 분명히 위에서 아래로 눈이 내려오는데도 가끔 위로 눈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세월은 분명히 앞으로 흐르지만 가끔 뒤로 갈 때가 있다. 추억이라는 힘이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잡아끄는 것이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마음에 둘 거라고,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내버려 둘 거라고, 추억의 힘을 속절없이 인정하며 이 노래는 끝난다. 타악기의 두드림 한번 없이, 가창력 자랑 한번 없이 듣는 이의 눈물을 쏙 빼놓고선.
이영훈은 47년 삶을 음악의 땔감으로 불태우고 쓰러졌다. 2월 중순 겨울의 끝자락 어느 날이었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아들을 찾아온, 그렇게 음악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영훈아, 너같이 대단한 아들을 둬서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어머니와의 일화만큼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이영훈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가족들의 전언에 따르면, 생과 사의 국경을 넘나들면서도 이승의 것인지 저승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멜로디와 가사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하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이 이영훈의 노래가 가장 절절하게 들리는 계절이다. 그대의 2022년은 어떠했는지? 많이 사랑했는지? 아직 생생하게 느껴지는 환희도 슬픔도 분노도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점점 아련하게 흐려지겠지만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라. 어느 먼 훗날 하늘로 올라가는 눈처럼 엉뚱하게 되살아나기도 할 테니. 독자님들 올 한 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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