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종합] "마침내, 해일의 해"…박해일, '헤어질 결심' 무게 견디고 청룡으로 반환점(청룡영화상)
[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데뷔 21년 차, 미결이었던 배우 박해일(45)의 연기 인생은 마침내 완결로 꽃을 피웠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더할 나위 없었던 2022년은 '박해일의 해'다.
2001년 연극 '청춘예찬'으로 데뷔, 같은 해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성우(이얼)의 아역으로 충무로에 등판한 박해일은 옛된 말간 얼굴과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단번에 관객의 눈도장을 찍으며 영화계 루키로 등극했다. 이후 '국화꽃 향기' '살인의 추억' '연애의 목적' '괴물' '극락도 살인사건' '이끼' '최종병기 활' '덕혜옹주' '남한산성' 등 사극부터 액션, 드라마까지 장르 불문 흡인력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어느덧 데뷔 21년 차를 맞은 박해일에게 2022년은 잊지 못할 특별한 한 해가 됐다. 서스펜스 멜로 영화 '헤어질 결심'(박찬욱 감독, 모호필름 제작)으로 제75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으로 초청돼 전 세계 씨네필들로부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올해 마지막 제43회 청룡영화상을 통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 인생 최고의 방점을 찍었다.
청룡영화상 수상 이후 스포츠조선을 찾은 박해일은 2011년 열린 제32회 청룡영화상에서 '최종병기 활'(11, 김한민 감독)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11년 만에 두 번째 주연상 트로피를 차지한 소감으로 말문을 열었다. 박해일은 "2014년 열린 제35회 청룡영화상에서 '제보자'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그때를 마지막으로 청룡영화상과 인연이 뜸했다. '헤어질 결심'으로 올해 정말 오랜만에 청룡영화상 초대를 받게 됐는데 그래서인지 유독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배우로서 타박타박 느리지만 천천히 해마다 한 작품씩 해오려고 노력하는데 그러한 나만의 시간이 헛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 무엇보다 올해는 좋은 감독, 작가, 배우 등 좋은 구성원들과 동료를 새롭게 만나는 해였는데 그런 우리의 만남을 관객이 좋아해 주고 또 작품을 진지하게 봐줘서 특히나 감사했던 해였다. 혼자 유독 과거를 돌아보게 된 한해였고 스스로 '행복한 해였구나' 곱씹으며 청룡의 레드카펫을 밟았다"고 밝혔다.
그는 "청룡영화상이라는 시상식 자체가 워낙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의 선택을 해왔고 그러한 선택이 모두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권위 있는 시상식 아닌가? 사실 후보로 초대를 받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기분이라 수상까지는 정말 욕심내지도 않았다. 청룡영화상은 주인공을 만들기도 하지만 일단 초대받은 모든 영화인의 노고를 위로하고 장려하는 자리이지 않나? 또 이렇게 많은 선후배를 어느 자리에서 한 번에 만날 수 있겠나? 참석만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시상식이라 감격했는데 덜컥 상까지 받았다. 정말 올해 더없이 행복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고 웃었다.
비단 청룡영화상뿐만 아니라 제27회 춘사국제영화제, 제31회 부일영화상, 제23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제58회 대종상까지 남우주연상을 독식한 박해일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사극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 김한민 감독)으로 726만명을 동원, 흥행까지 성공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박해일은 "그저 나는 투박하게 내가 하던 리듬대로 작품을 이어갔는데 올해 팬데믹이라는 영향 때문에 다양한 작품을 한꺼번에 선보이게 됐다. 투박한 나를 세련되게 가꿔준 감독도 있고 내 과묵함을 깊이 있게 만들어준 감독도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많은 감독이 내 연기 인생의 내비게이션과 같은 안내자 역할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올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사로잡은 '헤어질 결심'에서는 예의 바르고 청결한 형사 장해준으로 변신한 박해일은 특유의 단단하고 정갈한 내공과 세밀한 감성 연기로 캐릭터를 입체적이고 품격있게 완성했다. 기존 장르물 속 형사 캐릭터와는 차별화된 박해일표 장해준으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으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다.
전 세계가 인정한 거장 감독으로 손꼽히는 봉준호 감독에 이어 박찬욱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박해일. '거장들의 뮤즈'가 박해일은 박찬욱 감독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나를 비롯해 많은 배우에게 너무 큰 영광이고 함께하고 싶은 감독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만큼 부담으로 작용되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큰 산 아래 나라는 작은 배우가 작품에 걸맞게 드러나야 한다는 게 굉장한 중압감으로 작용되기도 하더라.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특별히 '헤어질 결심'은 기존의 작품보다 배우들이 더 돋보이고 관객에게 사랑받길 원했다. 그런 상황에서 '헤어질 결심'에 임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지점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헤어질 결심' 속 여러 명장면 중 송서래(탕웨이)의 실체를 알게 된 장면과 송서래의 진심을 알게 된 이후 바닷가 엔딩 장면을 가장 힘들게 촬영했다 꼽은 박해일은 "장해준이 송서래의 집에서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고 말하는 신이었다. 어떤 톤으로 또 어떤 감정으로 장해준의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내가 붕괴된 느낌이었다. 내 기질에서 전혀 해보지 못한 연기와 상황이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다. 박찬욱 감독도 옆에서 이렇게 도와주고 저렇게 도와주고 애를 써줬다. 촬영이 있기 사흘 전부터 세트에 방문해 혼자서 중얼중얼하며 연습했다. 촬영하는 순간까지도 감정을 놓치기 싫어 고민이 컸고 난감했는데 결과적으로 박찬욱 감독이 멋진 장면을 만들어 줬다"고 곱씹었다.
이어 "엔딩인 바닷가 장면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송서래를 찾기 위해 바닷가에 뛰어 들어가는 신인데 갑자기 블랙아웃이 되면서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자는 이런 상태를 무아지경이라고도 하고 무중력 상황에 걷는 기분이라고도 한다. 순간 주변에 스태프, 카메라가 모두 사라지고 블랙아웃이 됐다. 스스로도 장면에 완벽히 집중하는 줄도 모르고 연기했던 것 같다. 또 송서래와 처음 만나는 취조실에서도 탕웨이의 작은 호흡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무중력 상태가 된 기분을 느꼈다. 작품을 이렇게 빠져서 연기한 적이 거의 처음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의 봉준호 감독에 이어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뮤즈가 된 박해일은 "박찬욱 감독은 예술가다. 이 한 명의 예술가가 모든 걸 장악하고 어마어마한 창작자의 감각으로 모든 표현을 쏟아내는 것이다. 배우들의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잡아내 캐릭터에 녹여낸다. 대단한 내공이지 않나"고 감탄했다.
박해일은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도 관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개봉 10주년, 20주년을 관객이 기념하기도 하고 리마스터링돼 재개봉하기도 한다. 나도 내 영화 데뷔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리마스터링됐다. 20년 전 청춘을 이야기하는 영화라 처음에는 지금의 내가 이입을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캐릭터에 대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다시 한번 '임순례 감독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구나' 생각하게 됐다. 동시에 박찬욱 감독에 대한 생각도 더 깊어졌다. 사진도 영화도 사람도 시간을 견디는 것들이 있지 않나? '헤어질 결심'도 10년, 20년 뒤에도 시간을 견뎌 관객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헤어질 결심' 못지않게 '한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박해일은 "김한민 감독의 입장이 돼보지 않아 감독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약간 서운한 눈치를 읽었다. 나 역시 '헤어질 결심'과 '한산' 연달아 개봉할지 정말 몰랐고 두 작품 모두 최선을 다해 임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한산'도 너무 좋은 작품인데 '헤어질 결심'으로 상을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에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 팀에는 미안하지만 청룡영화상이 끝나고 '한산' 팀과 뒤풀이를 가지기도 했다. 김한민 감독과는 '극락도 살인사건'(07)부터 '최종병기 활' '한산'까지 세 작품 호흡을 맞추지 않았나? 김한민 감독도 수상에 너무 큰 축하를 해줬다. 박찬욱 감독이 미국에서 HBO Max 드라마 '동조자'를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데 한국에 돌아오시면 다 같이 '헤어질 결심' 뒤풀이하고 싶다"고 전했다.
올해 43회를 맞은 청룡영화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의미 있는 수상 기록으로 특히 많은 화제를 모았다. '헤어질 결심'은 박해일과 탕웨이가 한 작품으로 남·여주연상을 모두 가져가며 완벽한 연기 호흡을 증명했다. 앞서 1963년 열린 제1회 청룡영화상에서 '혈맥'으로 김승호·황정순이, 1966년 제4회 청룡영화상에서 '시장'의 신영균·문정숙이, 1991년 제12회 청룡영화상에서 '사의 찬미'의 임성민·장미희가, 1992년 제13회 청룡영화상에서 '경마장 가는 길'의 문성근·강수연이 한 작품으로 주연상을 동시에 꿰찬 사례다.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과 탕웨이는 43년 청룡 역사상 다섯 번째 한 작품 동시 주연상이며 21세기 첫 기록이기도 하다.
박해일은 "청룡영화상을 통해 장해준과 송서래(탕웨이)의 미결된 사랑이 완결로 끝났다는 영화 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렇게 봐주셨다면 작품에 참여한 배우로서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 싶다"고 인사를 건넸다.
탕웨이를 떠올리던 박해일은 "배우들이 집중하는 방식과 스타일이 각기 다르다. 그런데 탕웨이는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어두운 캐릭터를 연기할 때 스스로 상처를 내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탕웨이가 촬영 중 발목을 접질러 다친 적이 있었는데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 앞으로 촬영과 타지에서 고생하는 탕웨이의 상황이 안타까워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탕웨이는 달랐다. 발목을 접지른 김에 송서래의 상처에 더 근접할 수 있어 오히려 잘됐다고 하더라. 그때 느꼈다. '탕웨이는 저런 스타일이구나'"라고 밝혔다.
이어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송서래가 가진 아픔이 느껴져 정말 가슴이 아팠다.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때 정말 예민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탕웨이는 이런 어려운 캐릭터를 그냥 자신의 것으로 만들더라. 한 번은 부산에서 그날의 촬영을 마치고 산책하러 해운대 바닷가를 걷는데 그곳에서 탕웨이를 만났다. 목발을 옆에 두고 발에는 깁스를 한 채 바닷가를 바라보며 혼자 앉아 있더라. 그 모습에서 모든 걸 내려놓은 송서래가 보였다. 탕웨이가 아니라 송서래 그 자체였다. 탕웨이는 그런 배우였다"고 떠올렸다.
올해 청룡영화상의 백미로 꼽혔던 정훈희와 크로스오버 라포엠의 '안개' 축하 무대도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았다. 1967년 발표된 가수 정훈희의 전설적인 명곡 '안개'는 '헤어질 결심'의 메인 테마곡 중 하나로 배우들의 연기 못지않게 많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박해일은 "사실 '헤어질 결심' 팀 모두가 정훈희 선생의 '안개' 무대를 직접 보게 될 줄 몰랐다. 아마 현장에 있는 모든 배우, 영화인들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도 못한 '안개'가 흘러나와 정말 깜짝 놀라고 심지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안개'라는 노래가 굉장히 오래전 노래이지 않나? '헤어질 결심'이 아니었다면 젊은 관객은 특히 접하지 못했을 노래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영화의 힘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지금 시대에 낯선 정서를 가진 노래가 시간을 견뎌 하나의 작품으로 만나 세대를 뛰어넘는 문화를 공유하게 만들지 않았나? 감성의 공유는 위대한 것 같다"고 감탄했다.
원곡자인 정훈희가 선사한 절절하고 애절한 감동의 무대에 '헤어질 결심' 속 서래의 감정에 이입한 탕웨이는 객석에서 눈물을 왈칵 쏟아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탕웨이가 우는구나, 마침내'. 아마 그 순간 흘린 눈물은 탕웨이의 눈물이 아닌 송서래의 눈물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탕웨이가 송서래를 준비하면서 또 실제로 촬영하면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가 '안개'다.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탕웨이의 눈물이었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탕웨이가 누구보다 이 작품을 솔직하고 온전히 대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싶다. 감동적이었다"며 "같은 배우로서 탕웨이의 마스카라가 번질까 봐 걱정된 순간이기도 했다. 박해준(배우 박해일과 '헤어질 결심' 속 장해준)의 감정으로 탕웨이의 어깨를 다독인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일은 "개인적으로 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양은 중요하지 않다. 올해 21년 차가 됐지만 나는 아직 길을 걷는 기분이다. 다만 '헤어질 결심'으로 한 챕터의 종착역을 찍은 기분이다. 박해일이라는 버스가 A라는 정거장에서 시작해 Z라는 종착역에 도착했고 다시 Z라는 정거장에서 A라는 종착역에 가는 느낌이다. 반환점이자 순환인 것 같다. 그 기점에 청룡영화상이 내게 좋은 양분을 준 것 같다. 훗날 내가 연기 인생을 돌아봤을 때 영광스러운 수집품이자 추억이 된 것 같다. 오래 견디고 지켜진 청룡영화상처럼 나도 다시 마음을 정진해 더 단단히 견디고 나만의 소신을 지켜가겠다"고 말했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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