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 쌈짓돈인가, 빌린 돈인가···전세보증금 너의 정체는?
※기사 말미에 현직 변호사, 부동산 전문가, 법무부 등의 조언을 참고해 ‘전세계약 유의사항’을 정리해 뒀습니다. 전세계약을 준비하는 분들이라면 유의사항만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주간경향] 전입신고와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할 것. 집주인이 받은 융자와 보증금 합계가 부동산 시세의 70% 이하일 것. 잔금 지급일이 경과하기 전까지 근저당권 설정 행위를 하지 않고 위반할 경우 계약을 무효로 한다는 ‘특약’을 계약서에 넣을 것. 계약날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아 기존과 달라진 것이 있는지 재확인할 것.
전셋집을 찾고 있는 30대 직장인 이수영씨가 지난 10월, 정리한 계약 시 유의사항이다. 이씨는 유튜브, 인터넷 검색, 지인 조언 등을 통해 해당 정보들을 습득했다. 5년간의 직장생활을 통해 모은 돈 전부와 부모님 돈까지 빌려 마련한 ‘보증금’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때마침 금리상승으로 인한 집값 하락이 가속화되며 세입자가 ‘갑’이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운 좋게 싸고, 좋고, 안전한 집을 구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씨는 우선 출퇴근이 쉬운 서울 용산역, 당산역 일대 집부터 찾기 시작했다. 대학생활부터 자취생활을 한 이씨의 꿈은 ‘원룸 탈출’이었다.
기대와 현실은 달랐다. 이씨는 부동산을 직접 방문해 원하는 조건을 말했다. 부동산 정보를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두 군데 이상 가입해 실시간으로 매물을 확인했다. 그 결과 신축급으로 상태가 좋고, 역에서도 가까운 집을 발견했다. 마음에 들었지만 약간의 융자가 있다는 점이 걸렸다. 그가 망설였던 단 하루 사이 계약은 이뤄졌다. 이씨는 “부동산에서 연락이 와서 다른 세입자가 집을 보지도 않고 계약 했다고 하더라”며 “인터넷을 보고 만든 유의사항이 현실과 맞는 것인지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폭락했다는 아파트 전셋값은 여전히 최소 4억원 이상이어서 꿈도 꾸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치솟는 금리로 집값이 폭락한다는 경고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자고 나면 1억원씩 오른다’던 비정상적 상승기를 거친 뒤의 하락이다. 그럼에도 기준은 ‘최고점 대비 얼마나 빠졌느냐’에 맞춰진다. ‘폭락’이라는 분위기, 정부의 ‘영끌족 구하기’식 대책에 냉소적 반응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특히 2030세대의 현실은 일부 ‘영끌족’이 아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쪽에 더욱 가깝다. 실제로 이른바 ‘빌라왕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이 2030세대였다.
수도권에만 1139가구를 소유한 임대업자 김모씨의 사망은 집주인들의 ‘자산 걱정’에만 쏠려 있던 관심을 세입자들의 ‘고통’으로 돌리게 했다. 김씨 사망으로 임차인들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며 피해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정부는 ‘전세대출 보증 연장’과 ‘전세피해 지원센터를 통한 법률상담’ 등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대책들이 피해자들의 보증금을 돌려주지는 않는다. 반면 영끌 대출 등을 통해 집을 산 사람들에게는 ‘안심전환대출’(변동금리·준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을 최저 연 3.7% 금리의 장기·고정금리·분할상환 상품으로 갈아탈 수 있는 정책 금융)의 기회가 주어졌다. 연 4%대 금리의 ‘특례보금자리론’도 준비 중이다. 매매가 활성화될 때까지 버틸 수 있게 하거나 매매 수요의 확대를 꾀하는 ‘실질 대책’이다. 정부 대책의 온도차는 “집 없는 설움은 부동산이 상승하든 하락하든 똑같다”는 푸념을 만든다.
■‘보증금’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로 알려져 있다. 자본이 부족했던 시기 일종의 ‘사금융’ 역할을 하며, 경제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동산 투기 등을 통해 부를 쌓는 이들을 양성하며 시장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다. 전문가들은 수십년 전부터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후진적 제도이며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제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경제활성화를 위한 저금리 기조가 상당 기간 이어지며 ‘전세 소멸론’은 현실이 되는가 싶었다.
그로부터 상당 시간이 지났다. 전세제도는 여전히 한국의 주요 임대차계약형태다. 한국에서 탄생한 유일한 제도도 아니었다. 기원전 15세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사한 제도가 발견된다. 볼리비아에 ‘안티크레티코’라는 전세제도도 있다. 조선 후기 가사전당(가옥에 대한 임차)을 한국형 전세제도의 출발로 보면 역사가 짧지도 않다. 전세를 나름 합리적 선택으로 가다듬어 왔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다시 고금리 시대가 왔다.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매매가와 전세가가 역전되는 ‘깡통전세’, 계약 갱신 시점에 전세 가격이 2년 전보다 낮게 거래되는 ‘역전세’ 등의 문제가 있지만 고금리는 공급 측면에서 ‘전세 존속론’을 지지한다. 전세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하기보다 부작용을 막을 방안이나 고민했어야 한다는 아쉬움만 커졌다.
실제로 전세제도는 경제위기 때마다 문제를 노출했다. 개선의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핵심은 ‘보증금’의 안정성이다. 임차인이 집을 빌리는 대가로 지급하는 보증금은 서울 기준, 수억원을 호가한다. 여기서 ‘보증금’을 어떤 개념으로 볼 것이냐가 문제로 떠오른다. 집을 빌려준 대가로 기한을 정해두고 맡아둔 ‘담보’ 성격이라면 정해진 시기 상환이 가능하도록 잘 보관해야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임차인으로부터 받은 보증금을 또 다른 집을 사거나 주식에 투자하는 형태로 사용해도 제약이 없다. 보증금은 다음 임차인이 들어올 때 내는 돈으로 상환한다. 당연해 보이지만 유사한 개념이 ‘카드 돌려막기’다. 한 번 자금 순환이 경색되면 연쇄 피해가 발생한다는 점까지 닮았다.
전문가들은 ‘보증금’이 원칙적으로 임대인의 채무라고 지적한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세는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임차인에게 빌려주면서 사실상 돈을 빌리는 것”이라며 “임대인이 집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임차인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전세를 ‘사금융’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주택 수요 등의 문제로 이 개념이 뒤집혀 있다. 구본기 생활경제연구소 소장은 “보증금을 집주인이 차입한 돈으로 본다면, 전세보증금도 LTV(주택담보대출비율)처럼 일정 비율로 규제할 수 있었을 것”이며 “천정부지로 치솟는 보증금을 잡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는데 개념이 뒤집혀 있어 적용이 어렵다”고 말했다.
보증금 문제에 대한 정부 대책 역시 임대인의 상환 의무를 강화하기보다 사고가 나면 정부가 떠안는 쪽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도시보증공사(HUG·허그)의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제도다. 임대인 1명당 가입할 수 있는 주택 수의 제한도 없고,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에 대한 제한도 없다. 주택가격이 6억원인데 전세보증금을 6억원을 냈어도 가입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깡통전세 문제가 발생해도 임차인, 임대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구조가 된다. 일부 문제가 있더라도 선의의 세입자를 구제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문제는 ‘빌라왕 사건’처럼 이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허그는 빌라왕 김모씨가 사망해 ‘구상권을 청구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대위변제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실효성 없는 대책은 또 있다. 지난 11월 22일 국토교통부와 법무부는 ‘전세 사기 및 깡통전세 방지를 위한 임대차제도 개선 방안’이라며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 양식을 개정했다. 계약서 특약으로 ‘임차인이 전입신고를 하기로 한 다음 날까지 임대인이 저당권 등 담보권을 설정할 수 없다’는 것과 ‘위반 시 임차인에게 해제, 해지권과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된다’는 점을 넣은 것이 특징이다.
서울 용산, 영등포 일대의 부동산 다섯 군데를 방문해 ‘지난 11월 개정한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를 알고 있느냐’, ‘집을 계약하려고 하는데 바뀐 표준계약서로 계약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물었다. 3곳은 표준계약서 개정 여부를 몰랐다. 1곳은 알고는 있지만 사용할지는 집주인과 협의해보겠다고 답했다. 마지막 1곳은 표준계약서는 임대사업자 전용이지, 일반 임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개정된 표준계약서는 전세계약 시 누구나 사용가능하다. 임대사업자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다.
표준계약서에 대해 중개업자가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의무사항이 아니어서다. 임대인이 사용을 거부하면 그만이다. 정부가 발표한 ‘임대차제도 개선 방안’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무색하다. 법무부 관계자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은 민법 특별법으로 법 성격이 사법이기 때문에 표준계약서가 있더라도 사용을 강제하기 어렵다”며 “공인중개사협회나 전국 지자체에 표준계약서 사용을 독려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현장에서 활성화가 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해 임대인의 국세 체납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게 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노력은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법무부는 임차인에게 임대인 체납정보 확인권 신설, 최우선변제금 범위 확대 등을 포함한 대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실효성 비판이 나온다. 서진형 공동주택포럼 공동대표(경인여대 교수)는 “임차인 대부분이 을의 입장에서 계약을 하는데 임대인에게 납세증명서 제시를 요구하거나 과세관청에 체납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임대인에게 동의를 해달라고 하는 게 가능하겠느냐”며 “세금 체납 여부 등은 부동산 등기사항증명서에 바로 등기하게 하거나 이게 어렵다면 적어도 공인중개사가 임대인 동의를 얻어 체납정보, 선순위보증금 존재 등을 확인할 수 있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현실적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보증금을 다음 세입자가 확정돼야 돌려받을 수 있다’는 방식이 유지된다면 전세 사고를 완벽히 막을 방법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현행 제도에서 세입자는 수억원을 맡겨두고 집주인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청년세대 노리는 전세 사기
현행 전세제도의 허술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지현씨는 지난여름 전셋집을 구하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서울 주요 도심의 오피스텔, 빌라가 3억원을 경계로 밀집해 있다는 것이다. 한씨는 “한번은 8평 원룸을 누가 3억원이나 주고 계약할까 싶어서 부동산에 물어봤다”며 “청년전용 버팀목전세자금 대출이 보증금 3억원 이하에만 나오기 때문에 최대한도로 맞춰뒀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정부가 청년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금리 1.5~2.1% 정도로 전세보증금을 지원해주는 것이 버팀목 대출이다. 이를 청년들에게 받아낼 수 있는 보증금의 최대한도로 설정하고 부동산 중개 현장에선 일종의 시세로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기자가 전세 3억원에 나온 ‘1.5룸’을 방문해봤다. 가격 조정이 가능하냐고 부동산에 묻자 “버팀목 대출이 가능하면 몇백만원 깎는 것보다 4년까지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특약을 넣는 게 어떻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반대로 3억3000만원에 나온 투룸을 찾아 이번에는 3억원에 계약해야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가격 조정을 요청했다. 중개업자는 “실제 계약은 3억3000만원에 하고, 3억원짜리 계약서를 쓰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이들은 ‘경험·정보 부족’ 등으로 속기 쉬운 청년세대를 먹잇감으로 보고 있었다.
전세계약을 둘러싼 편법, 불법 행태가 만연하고 있지만 언제 개선책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정상 전세계약을 포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에 주간경향은 부동산 전문가, 현직 변호사 등의 조언을 구했다. 정지웅 법률사무소 정 변호사는 “실제 전세 사기를 당한 임차인들 사례를 바탕으로 유의사항을 정리했다”며 “참고로 하되,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에 계약 시 조금이라도 꺼림칙하면 꼭 전문가를 찾아서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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