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은퇴 시즌2] 노후는 침노하는 자의 것
(서울=뉴스1)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 나는 2022년 2학기에 방송통신대학교(방송대) 일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교양과목들을 또 들을 필요가 없어 바로 전공으로 건너뛴 것이다. 일본학과를 택한 이유는 고령사회와 인구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일본 원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입학 원서 내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성적증명서도 대학 간에 공유가 되므로 공유할 것을 허락해주면 된다. 간단하게 입학했다. 하지만, 조폭 조직의 구호처럼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다’는 곳이 방송대다.
3학년으로 바로 편입하다 보니 히라가나, 가다카나 겨우 읽을 줄 알고 일본어 문법책 대충 훑어 본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학습이 모두 이루어지다 보니 온라인 환경에 익숙해야 한다.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두 달 정도 지나니 전체의 학습 방식 체계가 파악되어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기초 과목을 뛰어넘다 보니 중간 출석 수업에서 시험을 볼 때는 갑자기 히라가나가 생각나지 않아 답을 쓸 때 애를 먹기도 했다. 역시 벼락치기는 예나 지금이나 시험에는 유효한 방법이다.
기말시험을 볼 때는 시험 날짜를 착각했다. 이런 실수는 생애 처음이지 아닐까 싶다. 12월 18일 시험 보러 앉아 있는데 출석을 안 불러서 물어 보니 내가 신청한 시험 날짜는 12월 17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행히 행정실에 갔더니 강의실만 옮겨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모두 태블릿을 받아서 시험을 보는데 자신의 학번을 넣고 로그인을 하면 자신이 봐야 할 시험 문제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강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 각각의 시험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다. 좌충우돌 하는 사이에 벌써 한 학기가 지났지만 얻은 것은 많다. 그 경험을 몇 가지 적어 본다.
우선, 공부는 천재가 아닌 한 체계적으로 배워야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이 바빠서 일본어 공부를 잘 하지 못했는데도 3개월 정도 지나고 보니 어느 날 일본어 문장이 약간씩 해석되기 시작했고 대략 무슨 뜻인지 어림짐작이 되었다. 가다카나도 잘 못 읽던 나로서는 큰 변화다. 이런 식으로 학교를 다니기만 해도 2~3년 지나면 일본어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경제와 일본 사회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체계적으로 강의를 들으니 구조와 흐름이 파악되었다. 일본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둘째,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태블릿으로 시험을 쳐 보기도 했고, 다른 학습 센터에 가서 청년들과 같이 수업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직장 선배님께서 방송대 교수를 소개해 주신 덕분에 지식 이외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됐다. 평생 경제학, 금융, 투자 관련된 사람만 보던 내게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커피, 책 등 잔뜩 선물을 받아 왔다.
셋째, 적응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방송대에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학교의 교수라고 한다. 교수가 학생으로 적응 하려니 쉽지 않은 일이다. 필자도 경영대학원에서 한 과목 가르치는데 초기에는 한 번은 선생이, 한 번은 학생이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험 문제를 출제하다가 다른 사람이 낸 시험 문제를 풀러 가야 한다. 처음엔 다소 어색했지만 이제는 적응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연극을 할 때 화나거나 우는 연기를 할 때면 화난 얼굴의 가면과 우는 얼굴의 가면을 썼다. 이를 페르소나라고 한다. 나도 학생과 선생의 페르소나를 바꾸어 쓰면서 적응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학점을 잘 따려는 욕심이 없으니 재미 있게 공부할 수 있다. 지인들 중에는 방송대에서 모두 A학점을 받고 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는데, 굳이 젊은 사람들의 학점을 빼앗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점을 좀 깔아 줘야 젊은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한 생각을 달리 하니 시험 문제를 봐도 마음이 푸근했다. 학점보다는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2년을 공부해도 3년을 공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 필수과목을 안 듣고 졸업을 늦추면서 내가 좋아하는 과목들을 좀 들어볼 예정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꼭 맞는 말이다. 방송대에 다니겠다고 생각을 한 게 5년이 되었지만 이번에 전격적으로 저지르고 나니 그럭저럭 굴러갔다. 2022년 2학기는 강의, 원고 등으로 정말 바쁜 때라 아내는 휴학하라고 했지만 그냥 밀고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2학기부터 시작하다 보니 일본어 기초과목이 없어서 힘들기도 했다. 내년 1학기에는 이제 기초를 다지면서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저지르고 보니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성경에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 있는지 알려면 일단 문을 열어 보아야 한다. 인생 후반의 오리무중의 불확실한 세계도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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