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민진 “재능 고민하지 말고, 해야할 일 먼저 생각해야”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2022. 12.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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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값은 다 지불되었다... 그냥 쓰기만 하면 돼
우리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재능 지닌 백만장자
난 똑똑하진 않지만, 버틸 힘 있어
처음 쓴 건 쓰레기...계속 다시, 다작 욕심 없어
강렬한 첫 문장...마지막에 떠올라
청년들 게을러?... 생존보다 행복 추구 더 어려워
소설 '파친코'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으로 전 세계 '코리안 디아스포아라' 신드롬을 일으킨 이민진 작가.

“웃긴 건 이 사무실에는 연봉이 무려 일곱 자리나 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백만장자들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접시를 채운다는 거예요. 부자들은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요.”-이민진 첫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중에서’

이민진이 왔다. 목뒤로 수수하게 찰랑이는 다갈색 머리, 희고 반듯한 이마, 온유한 눈빛… 화선지에 담채로 그린 듯, 맑고 수려한 여성이 저벅저벅 걸어와 포옹했다. 키가 커서 깜짝 놀랐다. 유랑하던 소설 속 코리안들처럼, 그가 품은 겹겹의 너른 영토가 가슴에 깊숙이 압착되었다.

Min jin Lee. 30년간 써 내려간 재일조선인 4세대의 가족 서사 ‘파친코’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아프고 찬란한 실체를 세상에 알린 여자. 그 ‘디아스포라 3부작’의 출발점인 첫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출간을 위해, 이민진은 4일간의 짧은 내한 일정을 소화 중이었다.

갑자기 몰아친 한파로 거리가 스산했지만, 출간기념회에 초대된 독자들은 로또라도 당첨된 것 같은 상기된 얼굴로 광화문 극장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눈을 빛냈다.

잘 재단된 스트라이프 재킷, 청바지에 부츠 힐을 신은 그의 자태는 더할 나위 없이 쿨해 보였지만, 도리어 그는 내 숏컷과 남루한 회색 배기 팬츠를 칭찬했다. 스포트라이트를 타인에게 돌리는 게 몸에 밴 사람. 오십이 넘은 여자 둘이 마주 앉아 있으면, 5분도 되지 않아 산전수전 섞은 우정이 샘솟는다.

“내 소설은 처음엔 다 쓰레기였어요.” “오! 난, 너무 못생겼어요.”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사랑스러운 셀프 디스와 ‘살아보니 인생이 쿨할 수 없다’는 두서없는 수다가 이어졌다. “요즘엔 무대에 설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나요. 그동안 한국인을 짝사랑해왔는데, 이제 러브레터의 답장을 받는 느낌이 들어요.” “인연을 맺게 된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는 리얼리, 착해. 송강호는 슈퍼 쿨하죠.”

그 자신, 소설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수많은 낯선 이들의 마음을 얻고, 말의 물꼬를 터온 탁월한 대화자였다.

이민진과의 대화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다른 종류의 신선함을 선사했다. 질문 너머의 충동을 완전히 이해했고, 매번 더 크고 부드러운 답을 예비해두고 있었다. 올인하면서도 오버하지 않는, 은은한 에너지… 송강호와 봉준호를 표현했던 ‘슈퍼 쿨과 리얼리, 착해’는 바로 그 자신인 듯했다.

‘성공한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타이틀로는 설명이 불충분했지만, 이민자가 아닌 작가 이민진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비하의 레이어(layer)를 인내심 있게 통과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 그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나는 이민진이 두 편의 소설 ‘파친코’와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에 쓴 서사와 말투가, ‘진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I’m not 선자, I’m not 케이시.”

이민진은 예일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조지타운 대학교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생활을 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11년 동안 견습 작가였다고 표현했다.

민진은 강하게 손사래를 저었으나,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온전히 헌신한 사람 안에는 여러 다른 얼굴이 미묘하게 스며 있는 법. 정확하되 다정한 큰 사람, 이민진과의 대화를 전한다. 서울에서의 부족한 시간은 그가 태평양을 건너간 후, 감동적인 이메일로 보충해서 완성했다.

경계인의 서사로 세계적인 뜨거운 공감대를 얻고 있는 소설 ‘파친코’,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각각 26년, 11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에 걸쳐 쓰였다.

-2021년 펭귄 클래식의 ‘위대한 개츠비’ 신판 서문을 쓴 것으로 압니다. 피츠제랄드와 개츠비의 어떤 면이 당신을 사로잡았습니까?

“펭귄 클래식의 ‘위대한 개츠비’ 서문을 쓰기로 한 것은, 이민자의 관점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위대한 개츠비’는 원대하고 불가능할 정도로 낭만적인 목표들을 가진 아웃사이더들에 관한 책이라, 이민자들 중 많은 이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아웃사이더(외부인)들의 삶과 꿈을 파괴하는 부주의한 부자들에 대한 피츠제럴드의 비판에 동의합니다. 저의 주요 테마 중 하나가 계급/계층이었기 때문에 피츠제럴드의 관점을 통해 탐험하는 것은 저에게도 매우 즐거운 일이었죠.”

-최근에 저는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룬 3개의 소설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훈의 ‘하얼빈’과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 그리고 이민진의 ‘파친코’. 세 작품의 등장인물은 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지만, ‘파친코’의 무대는 정말 드넓었어요. 세대를 이어서 서사를 이어가는 힘은 무엇인가요? 이런 위대한 서사의 주인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이죠?

“제가 엄청난 대서사시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대서사시 같은 역사가 저를 소유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저로 존재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 책이 한 세대의 이야기만 담도록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요. 한편으론 관심사가 코리아 디아스포라로 특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주제만큼 강하고 오래 제 흥미를 끄는 것은 없습니다.

열아홉 살, 대학생 시절 처음으로 재일한국인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때부터 자이니치의 이야기에 끌림을 느꼈고, 끈질기게 연구하고 조사해 갔어요. 제 인생을 소비할 만한 이런 주제를 발견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자기 객관화와 비하를 인내심 있게 통과한 이민진의 온화한 얼굴. 그는 일곱 살에 부모님과 언니, 여동생과 뉴욕 퀸즈에 정착했다.

-이민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언제부터 자부심을 갖게 되었나요?

“저는 오랫동안 역사를 공부했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억압적인 체계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은 탐욕과 계급주의 그리고 극단적 자본주의에 의해, 소수자들은 다수에 의해, 아웃사이더(외부인)들은 내부자들에 의해 억압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 가난한 사람들, 소수자들, 외부인들은 그들을 억압하려는 모든 시도에 잘 버텨왔어요. 억압에 기꺼이 저항하고 반대하는 그들이 자랑스러워요.

희생자들을 미화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입고 불평등한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역사를 비추어 보아 억압을 마주하더라도, 선함을 유지하고 사랑하고 잘 지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당신 소설의 첫 문장은 힘이 있습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쳤지만, 상관없다(‘파친코’)”. “능력은 저주일 수 있다(‘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강렬한 첫 문장의 탄생 비밀을 알려주시겠어요?

“제 소설들의 모든 첫 문장은 책 전체를 드러내는 ‘주제문’이에요. 초고 단계에서 마음에 드는 첫 문장을 쓴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 첫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서 몇 번씩 책을 다시 씁니다. 전통적인 집필 방법은 아니죠.

저는 기자처럼 기록하고, 학자처럼 논문을 쓰는 작업 형식을 취해요. 몇 번의 퇴고를 거치면서 조금씩 첫 문장이 두각을 드러내죠. 수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한 후에야,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지고 제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죠. 그 과정에서 처음 쓴 글이 쓰레기가 되기도 합니다(웃음).”

애초부터 영감이 이끄는 매혹의 고지는 없었다. 모든 길을 다 밟아보고, 모든 목소리를 들어본 후 나온 ‘견고한 한 줄’은 광야의 북소리처럼 심장을 두드린다.

-완벽주의자인가요?

“(미소 지으며)저는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바보스럽죠. 긴장과 우울증세도 있고 고집불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감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50개의 각주를 모으죠. 저를 설득하려면 51개의 각주를 들고 와야 합니다. 저는 다작하지 않습니다. 많은 작품을 내는 건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권력과 돈은 필요 없다고 포기했어요.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가 따라오는 게 놀랍습니다. 하지만 저는 54살이에요(웃음). 그걸 기억해주세요.”

글이 풀리지 않을 땐 조지 엘리엇의 ‘미들 마치’를 계속 읽는다고 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좋은 책은 공들여 읽고 또 읽어야 한다고. 청년들이 시험 때문에 고전의 요약본을 읽는 걸 안타까워했다.

“독서는 거래가 아닙니다. 의도가 순수할 때 나를 변화시키죠.”

지독할 정도로 취재하고 다시 쓰는 이민진의 작업 방식. 가장 마지막에 첫 문장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십니까?

“보름달이 뜰 때만 씁니다(웃음). 농담이에요. 저는 이야기의 아우트라인(대략 줄거리)을 잡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바꿉니다. 일단 초안을 작성한 후 원고 전체를 다시 또다시 계속 수정해 가죠. 제가 일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고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방식을 야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지 않아요.

제가 잡은 아우트라인을 보면서 다루고 싶은 주제가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몇 개의 장면들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빠르게 생각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저를 ‘거북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일례로 그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다닌 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실제로 하버드 MBA에 지원해 학생들을 관찰하거나, 뉴욕의 유명한 디자인 스쿨인 FIT에서 한 학기 동안 모자 만드는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다.

-지독할 정도의 체험 취재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저널리스트 방식의 취재, 변호사의 조사 기법 등이 캐릭터 빌딩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나요?

“저는 세 가지 일을 모두 해봤기 때문에 기자처럼 인터뷰하고, 변호사처럼 양쪽의 입장에서 논쟁하고, 학자처럼 기록과 수치를 대조하며 제 가설을 검증합니다. 모든 과정에 더 긴 시간이 소요되지만, 제가 쓰고 믿는 것을 통해 스스로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매일 한 챕터 씩 성경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이민진의 루틴이다.

-매일 성경을 한 챕터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나서 저는 미국 작가 윌라 캐더가 매일 성경 한 챕터를 읽는다는 걸 떠올리고 그걸 제 작업 습관으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일을 사랑하게 됐죠.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제가 그런 걸 신경 쓸 나이는 아니지요. 저는 서양의 클래식한 문학에 심취해 있고,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서양의 문학과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거든요. 덕분에 성경을 7번 읽었어요(웃음).”

-덕분에 당신은 모든 사람을 결함과 아름다움과 재능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유년을 보낸 퀸즈는 어떤 곳인가요?

“퀸즈는 뉴욕에서 이민자가 가장 많은 곳입니다.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쿨하진 않아요. 쿨한 곳은 맨해튼이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할렘은 맨해튼에 있고, 빈부 격차가 심합니다. 한편 브루클린 사람들은 잘난 척하지만, 그것도 마케팅을 잘한 덕분이죠(웃음).”

-당신이 쓴 이야기는 얼마나 자전적입니까?

“나는 ‘파친코’의 선자가 아닙니다. 나는 케이시가 아닙니다.”

선을 긋는 얼굴조차, 선하고 온유했다. 웃음의 샘이 고인 듯한 그의 너른 이마와 초승달 눈썹이 조명을 받아 더욱 은은했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의 케이시는 북미 지역에서 성장한 똑똑한 여성이에요. 부모님이 지지하지 않는 길을 선택해서 가죠. 케이시가 저와 닮은 점은 키가 크고 발이 크다는 것 정도?”

이민진은 ‘백만장자’ 이야기 속의 한씨 일가와 ‘파친코’의 선자 일가가 지닌 힘을 이야기했다. 부모 세대의 서사와 동행하며, 갈피마다 스며든 파열과 고난의 아우라를.

-첫 책에 대한 가족의 반응은 어땠지요?

“(미소 지으며)부모님은 좋아하셨죠. 저는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26살에 변호사를 그만두고 37살에 첫 책을 출판했으니까요.”

부끄럽다,는 단어조차 왜 이민진이 발화하면 다르게 해석되는 걸까. 재능의 왕관은 세월의 한파를 지나 녹이 벗겨질수록 윤이 났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2007년에 세상에 나오면서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이민진은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 세계인의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 소설 '파친코'를 완성한다.

-편 당, 11년 혹은 26년의 창작 기간이라니… 지치지 않습니까?

“writer’s block(글길 막힘, 집필 장애 상태)으로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거든요. 희한하게도 글쓰기 자체는 간단합니다. 어려운 것은 실제로 옳은 내용이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현실 기반 소설을 쓰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것에 대한 정확성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처음 두 권의 책을 쓸 때는 제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훨씬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코리안 3부작’ 마지막 작품인 ‘아메리칸 학원’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교육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것에 제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확신해요.

저는 제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똑똑하지는 않지만,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게 남았다.

-한편 한국에 출간된 당신의 데뷔작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에는 미묘한 비꼼의 뉘앙스가 느껴지더군요. 의도했던 건가요?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미 권력과 풍요를 지닌 억만장자들에게 더 많은 공짜 음식을 대접하고 있어요. 그 아이러니한 풍경에 대한 풍자죠. 의도한 건 두 번째 의미입니다. 제임스 볼드윈의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어요.

‘우리의 왕관값은 다 지불되었다. 그것을 그냥 쓰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탤런트는 이미 다 지불되었습니다. 그걸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난 우리가, 진정한 백만장자가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운이 따르기를 기대하고, 매 순간 은혜를 구하게 되죠.”

그 자신, 소설을 쓰려고 변호사를 그만뒀지만, 계약한 출판사도 에이전시도 없는 막막한 상태였다. 돈도 궁한 상태에서 11년 동안 글쓰기 클래스를 전전하며 ‘모든 기대를 포기했고, 재능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들어줄 사람이 없더라도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우리의 탤런트는 이미 다 지불되었습니다. 그걸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커브를 돌듯, 돈과 섹스 얘기를 꺼냈다. 당시에 ‘돈과 섹스 이야기를 써보자’고 용기를 냈다고.

-돈과 섹스는… 모든 인생 드라마의 핵심이지요.

“매슬로의 욕구 이론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욕구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생존, 그 위로 안전, 사랑, 자기 존엄, 꼭대기에 자아실현이 있어요. 남녀 캐릭터를 정할 때, 그들이 돈과 섹스에 어떤 가치를 두고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를 상상해봐요. 사람마다 생존과 안전, 욕구 피라미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가 다 반응이 달라요.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에 나오는 엘라와 케이시는 상반된 여성입니다. 엘라는 부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돈을 축적할 필요가 없어요. 섹스도 결혼도 첫 남자와 했죠. 반면 케이시에게 섹스는 느끼고 즐기는 행위예요. 돈도 스스로 벌어야 했어요.

각 인물이 돈과 섹스를 어떻게 핸들링하느냐, 그걸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성장환경에서 증명해 보여야 하는 사람과 이미 넉넉하게 가진 사람은 어떻게 다른지… 케이시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었지만, 생존 욕구가 더 절실하죠.

그 가혹한 차이를 메워주는 사람이 케이시의 직장 상사이자 멘토인 ‘사빈’이다.

“전통적인 이민자 가정의 부모들은 생존에 올인하느라 자식들의 고민을 들어줄 시간이 없어요. 피곤에 지친 생물학적 부모 대신 “이리 와. 도와줄게.” 사빈이 무한한 친절을 베푸는 유사 어머니가 되어 주죠.”

그는 MZ세대가 게으르다는 평가는 부당하다고 했다.

"조부모와 부모 세대가 생존과 안전을 해결해준 덕에, 아이들은 행복을 찾아서 위로 올라갑니다."

“매슬로 욕구 이론의 맨 아래 단계가 생존이죠. 그게 충족이 되면 한 단계씩 더 위로, 꼭대기의 자아실현까지 올라가요. 조부모와 부모 세대가 생존과 안전을 해결해준 덕에, 아이들은 행복을 찾아서 위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거 아시는지… 생존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게 훨씬 더 어렵습니다. 기본 의식주가 더 간단해요. 윗세대가 생존 방법을 보여줬기에, 다음 세대는 레벨업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아이들에게 왜 이전 단계를 얘기하나요?

‘나는 어디 있나?’ ‘여긴 어디인가?’ 아이들은 위기에 봉착했어요. 청년들 게으르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퀸즈에서 신문 가판대, 작은 보석상을 하던 부모님과 살던 어린 이민진과 할렘에서 사는 50대 작가 이민진은 무엇이 달라졌나요?

“부끄럽지만 저는 거의 변한 것 같지 않아요. 많은 면에서 저는 아직도 어렸을 때 믿던 것들을 믿습니다. 선과 악을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고 수용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대부분의 이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했고 개개의 타인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인생을 살면서 사랑을 지속하고 있고, 매일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고자 노력해요.”

-인간 이민진은 굉장한 낙관주의자인 것 같군요!

“부모님이 쾌활하신 분들입니다. 부모님은 필요할 경우 많은 선한 일들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저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죠. 훌륭한 롤모델을 가질 수 있어서 스스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제게 작가가 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기술을 알려주신 것은 아니지만, 제가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탁월한 문제 해결사라고 믿게 됐어요. 그리고 그 믿음의 힘이 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데려다주었습니다.”

이 소설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했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다. 주인공인 케이시 한은 세탁소에서 일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지만, 부모의 기대와 달리 직업, 돈, 섹스에서 의아한 선택을 반복한다.

-한국어는 당신의 문학에 어느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지요?

“생활 속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걸 좋아해요. 그들의 목소리와 한국인 특유의 격정적인 다정함은 제게 사랑의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성이 ‘한’이에요. 케이시 한. 한씨 일가죠. ‘한’이라고 발음할 때 느껴지는 슬픔의 감정이 있잖아요? 한국계 미국인 2세대가 이 ‘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한’이나 ‘눈치’처럼 번역이 불가한 한국어 뉘앙스를 쓰는 걸 좋아합니다.

19세기 영미 소설을 보면 러시아어나 불어를 그대로 썼어요. 라틴어가 등장하기도 하죠. 그게 지성의 상징이었습니다. 내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특유의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어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작품도 ‘아메리칸 학원’인데요. ‘학원’이라는 한국어를 그대로 썼어요.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의 사랑과 존경이, 그리고 영어로 글을 쓰는 저의 능력이 제 이야기에서 잘 녹아들기를 바랍니다.”

-한국인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보편적인 울림을 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음악, 문학, 영화,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 작품에서 한국의 스토리텔러와 창작자들은 서사적 논리를 견지하며 일합니다. 시청자는 지능적인 패턴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런 자세는 매우 중요하죠. 예술가들이 참신함 그 자체를 특권으로 여긴다면, 혹은 독자를 속이기 위해 서사적 논리를 무시한다면 그 즉시 인기를 잃을 겁니다.

서사 속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죠. 서사적 논리가 없는 이야기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갖기란 불가능합니다.”

이민진 작가가 걸작이라 칭송하는 '미들 마치'를 쓴 조지 엘리엇. 그의 문학적 스승이다.

-재능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재능을 의심하고 자기 비하를 통과해내는 과정에서 작가로서의 독특한 무늬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재능에 의심이 들 때는 어떻게 이겨냈나요?

“집중할 수 없을 때는 밖을 걷거나 요리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책을 읽습니다. 다정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다른 사람을 위해 사소하지만 좋은 일을 하려고 꾸준히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해요. 만약 제게 재능이 있다면 제가 하는 일에서 드러나겠지요.”

-문학적 스승은 누구인가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는 시몬느 드 보봐르와 버지니아 울프를 언급하더군요.

“저의 문학 스승은 조지 엘리엇, 오노레 드 발자크, 구스타브 플로베르, 레프 톨스토이, 샬럿 브론테, 이디스 워튼, 싱클레어 루이스, 오드리 로드, 제임스 볼드윈 그리고 토니 모리슨 같은 작가들입니다. 저는 그들 중 누구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들을 오랜 친구처럼 느낍니다. 그들의 생생한 작품을 만났고, 그 배움에 감사하죠.”

-쓰는 용기, 기다리는 용기, 말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옵니까?

“제가 쓰기로 기다리기로 또는 의견을 말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건 그 일이 제 시간과 관심을 쏟을 만큼 중요하다고 결정했기 때문이죠. 때때로 저 또한 두렵고 낙담해요. 저는 천성적으로 내향적이고 불안하며 조용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무엇이 중요한지에 집중하고 버텨내려고 노력합니다.”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드러낸다면 훨씬 나아질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한다면, 또 더 나아질 겁니다."

-독자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저에게 시간을 내주는 독자에게 저는 최고의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막 자부심을 갖기 시작한 우리 시대의 청년들, 그리고 전 세계 이민자들에게 졸업 축사 같은 조언을 부탁합니다.

“항상 두렵고 걱정스러울 겁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저 역시 두려웠거든요. 하지만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드러낸다면 훨씬 나아질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한다면, 또 더 나아질 겁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스스로 바라는 것을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약해지세요! 그 점이 도움을 부를 겁니다.

저는 요즘 매일 울고 있어요. 나이 들어서가 아니에요. 평생 한국인들을 향한 러브레터를 썼는데, 이제야 답장을 받는 느낌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목소리와 의지를 존중해주세요! 당신의 꿈과 생각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선한 것이니까요. 타인에게 먼저 믿을 만한 친구가 되어주세요! 그러면 밝고 힘이 되는 공동체가 곁에 생길 겁니다. 멘토를 만난다면 좋겠지만, 먼저 좋은 친구를 많이 만드세요! 당신의 엄청난 미래를 미리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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