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현금 없는 사회의 그늘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금요일 퇴근길. 휴대폰을 받쳐든 손에서 채 30초도 안 돼 감각이 사라질 만큼 추위가 매섭다. 체감기온 영하 22도라고 했던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흥얼거리며 추위를 잊으려 애써 본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유난히 크리스마스 캐럴이 많이 들린다. 머라이어 캐리의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앤디 윌리엄스의 ‘잇츠 더 모스트 원더풀 타임 오브 더 이어(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 브렌다 리의 ‘로킹 어라운드 더 크리스마스 트리(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 등 고전 캐럴이 주를 이뤘다.
“체스트넛 로스팅 온 언 오프 파이어~”로 시작하는 냇 킹 콜의 ‘더 크리스마스 송(The Christmas Song)’도 빠지면 섭섭하다. 3년 간의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을 거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탓에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더 짙게 드리워진 듯 했다.
지하철역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연말연시 나눔의 상징인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종소리’와 함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패딩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넣어 봤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현금을 만져본 게 언제였더라?’ 챙겨야 할 경조사가 있거나 주일 미사 헌금 등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현금을 인출하는 수고도 안 하게 된지 오래다.
2015년 일본 경제산업성이 세계 각국의 현금 없는 결제 비율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의 소매 결제에서 비(非)현금 결제 비율은 무려 89.1%에 달했다. 7년 전 이야기다. 지금은 더 높아졌을 것이다. 정보기술(IT) 발달에 더해 세계적으로도 저렴한 우리나라의 카드 수수료가 현금없는 사회로의 이행에 촉매 역할을 했다. 같은 조사에서 미국의 비현금 결제 비율은 45%에 불과했다.
현금없는 세상이 편리한 건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편리함에 더해 거래 기록이 남기 때문에 재정 운용이 한결 투명해진다는 장점도 있다. 현금 사용 빈도가 줄면 국가 차원에서 화폐 제조와 관리에 필요한 자원을 아낄 수 있고, 위조지폐로 인한 경제 손실도 감소하게 된다.
◇ 상·하위 20% 자산 격차 64배 ‘역대 최대’
소비의 영역은 현금이 없어도 불편함이 없고 오히려 편리해졌지만, ‘나눔’의 영역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성당과 교회의 이웃돕기 바자회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구걸 말고는 생계를 해결할 길이 막막한 노숙인들에 희망을 전하는 것도 아직은 현금이 있어야 가능하다. 노점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를 도와드리려 해도 카드로는 불가능하다.
화려한 트리 장식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치솟는 물가와 추위 속에서 고통받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아직 많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빈부격차는 사상 최대로 벌어졌고 인구학적 위기와 빈곤, 사회적 고립 등이 겹치면서 혼자서 쓸쓸히 죽음을 맞는 고독사도 늘고 있다.
통계청이 얼마전 발표한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올 3월 말 기준 자산 상위 20%(5분위) 가구의 자산은 평균 16억5457만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자산 하위 20%(1분위) 가구 평균 자산(2584만 원)의 64.0배에 달하는 수치로,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12년(62.4배) 이후 최대다.
CNN은 “한국의 중년 남성이 고독사하고 있다(South Korea’s middle aged men are dying ‘lonely deaths)”라는 제목의 최근 기사에서 해마다 중년의 고독한 수천 명이 홀로 사망하고 있다”며 “종종 며칠, 몇 주씩 사망 후 발견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2021년 국내 고독사 숫자는 2412명→3048명→2949명→3279명→3378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5060 남성’ 고독사는 지난 5년간 45~52%를 차지해 단연 비율이 높았다. 정치적인 책임 공방도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작은 사랑의 실천이 더 절실한 때다.
구세군 모금원의 종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월요일에는 잊지 않고 현금을 뽑아 출근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낮은 곳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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