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나의 것] 그나마 나아진 '오늘'이 위협받고 있다
[미디어오늘 김윤정 칼럼니스트]
'크런치 모드'란 말이 있다.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신제품 출시 등 대형 이벤트를 앞두고 수면,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몰아 일하고 쉬면 되지. 늘 그렇게 일하는 건 아니잖아?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돈으로 다 보상해줄게. 노동자를 회유하는 여러 달콤한 말들로 비상식적인 과노동은 업계의 상식이 됐다.
'크런치 모드'는 소프트웨어 업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촉박한 제작 일정, 빠듯한 제작비, 들쭉날쭉한 스타의 스케줄까지.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 노동권보다 중요한 이슈는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무시되던 약자들의 권리는 때로 누군가의 생명까지 앗아갔다. 숱한 이들의 피, 땀, 눈물이 스며 방송가에도 조금씩 '주52시간 근무제'가 자리 잡게 됐다. 애초에 '주52시간 근무제'가 만들어진 것도, '크런치 모드'로 일하던 20대 근로자의 과로사가 산업재해로 인정받으면서였으니, 결국 이제껏 노동법은 노동자의 고통을 먹고 성장해온 셈이다.

이렇게 힘겹게 태어나, 이제야 겨우 자리 잡아가는 '주52시간제'가 유명무실해질 위기에 처했다. 후보 시절부터 '필요할 경우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던 윤석열 대통령의 노동법 손질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시간·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개혁안 발굴·수립 역할을 맡은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현재 '주52시간'으로 제한된 연장노동 관리 단위를 월·분기·반기·연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라는 권고안을 내놨다. 이 안이 입법되면 월 단위의 경우 단위 기간 내 평균 52시간, 1일 최대 11.5시간, 1주일 최대 69시간까지 노동이 가능해진다.
'주52시간'이 기준인 현재에도, 방송가는 언제나 '크런치 모드'를 요구받는다. 가장 심한 곳이 드라마 현장이고, 아직도 가장 변하지 않은 곳이 또 드라마 현장이다. 최근만 해도 KBS <미남당> 드라마 스태프가 강행군을 견디다 못해 '주52시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계약해지당하는 일이 있었다. 제작사에 '법을 지켜 달라'고 요구했다가 '해고'라는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당시 제작사는 해당 스태프들은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52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후 고용노동부 현장 근로감독에서 기술팀 팀원급 스태프 32명 전원의 노동자성이 인정됐으며, 주52시간제 위반 역시 확인됐다. (감독급 스태프 15명의 노동자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안이 노동부나 법원으로 가면, 대다수 스태프가 제작사의 지휘·감독을 받는 근로자로 판단된다. 여전히 많은 제작사나 방송사가 스태프를 여전히 프리랜서라고 여기지만 말이다. 여러 판례에서 '사용자에 의한 근무 장소, 시간 지정', '업무 내용이 사용자로 인해 정해지는지 여부', '업무수행과정이 구체적으로 지휘, 감독받는지 여부' 등인데, 제작사(사용자)로부터 이 부분에 대한 간섭을 받지 않고 일하는 드라마 스태프가 있을까? 개인사업자로 보고 '업무위탁계약서'를 썼더라도, 근로자성은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따지기 때문에 대부분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문제는 한 드라마의 스태프가 근로자로 인정받았다 해도, 동일한 조건의 근로자가 곧바로 근로자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드라마별로 근로감독을 요구해 근로자성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매번 이겨도 원점으로 돌아오는 '도돌이표'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 촬영이 끝나면 수입도 끊기기 때문에 대다수 스태프가 한 작품이 끝나자마자 다음 작품에 투입된다. '크런치 모드'가 멈출 새도 없이 과노동에 장기적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1년 경력의 스태프는 1년만큼의, 10년 경력의 스태프는 10년만큼의 피로를 계속 안을 수밖에 없다.

<혼술남녀> 故이한빛 PD 사망 사건, <화유기> 스태프 추락 사고, <킹덤>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태프 사망 사건, 그리고 스튜디오S 고(故) 이힘찬 PD 사망 사건까지. 많은 이들의 비극을 양분 삼아 겨우 틔운 변화의 싹. 아직 열매도 맺지 못했는데, 그나마 나아진 오늘마저 지키지 못할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정부가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내년 초까지는 입법 추진계획을 발표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방송 현장은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근로기준법을 기준으로 +α의 노동을 또다시 '당연하게' 요구할 것이다. 원래 진보는 느리고, 후퇴는 빠른 법이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새해인데, 어째 착잡한 마음부터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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